7년 동안 수라 갯벌을 카메라에 담은 황윤 감독의 6번째 장편 다큐멘터리 환경 영화, 바로 <수라>이다. 황윤 감독은 2006년 갯벌에 관한 다큐멘터리를 만들기 시작한다. 하지만 새만금 간척사업이 강행되고 그 과정에서 감독의 촬영을 도와준 어민이 바다에서 사고로 목숨을 잃는다. 그 트라우마로 촬영을 포기한다. 10년 후 감독은 ‘새만금의 도시’ 군산에 이사를 오고 오동필 시민과학자를 만난다. 감독은 새만금시민생태조사단으로 활동하는 오동필의 이야기를 듣고 과거에 포기했던 갯벌 영화를 다시 만들기 시작한다. 새만금 마지막 갯벌인 ‘수라’의 새들을 찾기 위해 집을 나서는 ‘동필’과 그의 아들 ‘승준’을 만나 다시 카메라를 들며 펼쳐지는 이야기이다. 말라가는 수라갯벌에서 기적처럼 살아남은 도요새, 검은머리갈매기, 흰발농게 등 자연의 이야기와 청춘을 바쳐 이들을 기록해온 사람들의 아름다운 동행 등을 그리고 있다. 《춘천사람들》이 환경의 소중함을 일깨우는 3편의 영화 감상평을 싣는다. - 편집자주

 

 

 

 

 

 

 

 

 

 

 

‘수라’ 갯벌을 아시나요?

수라는 ‘30년 넘게 진행된 새만금개발사업 와중에도 살아남은 원형 갯벌’ 이다. 40여 종의 멸종위기종을 포함한 다양한 생명들의 서식지이다. 새만금 신공항 건설 예정 부지로 지정되어 사라질 위기에 처한 갯벌이다.

새만금개발사업에 대한 나의 가물거리는 기억은 개발사업이 본격화되면 많은 해양 생물들이 사라질 것이기에 그 전에 그 풍광이나 눈에 담으려는 다소 철없는 생각으로 둘러본 것과 새만금개발 반대를 위해 전국을 삼배로 순례하던 몇 분의 성직자와 그 뒤를 따르던 시민들의 감동 어린 모습 정도이다. 다 잊고 춘천서 밥 잘 먹고 잘 놀던 나의 관심을 다시 새만금으로 끌어들인 것은 영화 <수라>다. 거의 모든 잘 나가는 대중매체는 오래전에 관심을 접고 내팽개친 ‘수라 갯벌’에 대해 새만금개발로 인해 이미 사라졌거나, 신공항 건설이 진행될 경우 추가로 사라질 위기에 처해 있는 다양한 생명체에 대한 다큐멘터리이다. 

영상에 비친, 얼마 남지 않은 갯벌에 의지하고 사는 생명체에 대한 신비로움, 감탄, 미안함과 동시에, 나를 놀라게 한 것은 바로 사람들인 ‘새만금생태조사단원’ 이다. 무엇이 그들을, 눈 내리고 바람이 몰아치는 겨울에도, 머리카락을 홀라당 태울 듯 이글거리는 여름에도, 갯벌로 달려오도록 하는 것일까? 갯벌 생명체의 어떤 매력이 그들과 이웃하겠다고 사람들을 안달하게 만드는 것일까? 조사단 부모 손에 이끌려 수라 갯벌에서 뒹굴고 갯벌 이웃들과 숨바꼭질하던 어린아이들은 이제 부모가 더 이상 등 떠밀며 갯벌로 데리고 갈 수 없도록 자랐다. 그런데 무엇이 어른이 다 된 그 아이들을 계속해서 갯벌로 부르고, 힘들게 살아남은 갯벌 식구들을 찾고, 서로 안부를 묻게 하는 것일까?

다큐멘터리를 보면서 다음의 질문들이 계속 내 머리를 떠나지 않는다. 첫째, 정부가 계획하고 주장했던 새만금개발 목표를 제대로 달성도 못 했음에도 불구하고 뚜렷한 기약도 없이 애먼 갯벌만 뒤집어 대는 이유는 뭘까? 혹시 새만금 개발사업으로 권력을 쥐거나 돈방석에 앉게 된 관련자들이 아직 계산이 남았다고 생각하기 때문은 아닐까? 둘째, 지금도 ‘밑 빠진 독’이라는 수식어가 따라다니는 군산공항 바로 옆, 긴 개발 기간에도 가까스로 살아남아, 그 이름대로 비단결처럼 아름다운 자태를 지닌 수라 갯벌을 파괴하며 굳이 새만금신공항을 짓겠다는 이유가 뭘까? 혹시 미국의 중국 견제를 위한 미군기지 확장을 위한 것인가? 만일 그렇다면, 혹시 미국과 중국 사이 무력 충돌이 일어나면, 두 나라가 자기 본토가 아닌, 한반도를 싸움터로 삼겠다는 속셈은 아닐까? 여러 생각으로 등줄기가 서늘해진다. 

방조제로 가로막힌 모래톱에 숨어 바닷물이 들어오길 간절히 갈망하다, 빗물을 바닷물로 착각하고 물을 반긴 조개의 끔찍한 결말과 굶어 죽은 도요새의 형상에 가슴이 답답해지며 한숨이 나온다. 한편, 갯벌의 여러 생명체와 호흡하며 서로의 아픔을 쓰다듬는 어민들과 새만금생태조사단원들의 모습에 가슴이 미어지기도 하고 벅차오르기도 한다. 이미 늦었다고 단념하고 새만금의 친구들을 잊고 살아온 나 자신에 대한 부끄러움 또한 커진다. 2006년 방조제 마지막 물막이공사 후, 모두가 떠나버린 그곳에서, 그 긴 시간 외롭게 갯벌을 지켜 온 수라 갯벌 친구들을 향한 미안함도 늘어난다. 

당장 만나러 가야겠다. 가서 그동안의 나의 무지와 게으름, 그리고 외면을 솔직하게 고백하고 친구의 아픔과 외로움에 귀 기울여야겠다. 친구와 풀리지 않는 손깍지를 끼고 이제부터는 절대 혼자 남겨두지 않겠다고 약속해야겠다.

박혜순 (《춘천사람들》 독자위원)

 

 

〈수라〉의  ‘소리 없는 아우성’

안경술 (발도르프 교육활동가)

수라야~ 수라야~

영화 뒷부분 두 사람이 서서 수라 갯벌을 향해 “수라야~” 부를 때, 나도 같이 울컥했다. 황윤감독이 “한 번 더” 하자 오동필 단장이 “못 하겠어”라고 하는 부분에서는 내 마음에서도, 눈에서도 눈물이 터져버렸다. 아이 잃은 어미처럼, 엄마 잃은 아이처럼 목 놓아 엉엉 울고 싶었다. 100분의 시간 동안 영화 <수라>는 갯벌과 나를 연결했다. 

어렴풋한 기억으로도 학창시절 ‘새만금간척사업’을 이야기하시던 선생님의 음성이 매우 기대에 차 있었던 것 같다. 언론에서는 좁은 우리나라에 대단한 크기의 농지와 산업단지로 쓸 수 있는 땅이 생기는 거라 했다. 생각 없는 우리도 덩달아 그저 들떴다. 뉴스에서 간척사업을 반대하는 성직자들의 삼보일배를 화면으로 지켜보면서도 무심히 지나쳤었다. 그리고 잊었다. 나 같은 사람들이 무시하며, 무지한 세월을 사는 동안 그곳에서 어떤 일이 일어났는지를 영화 수라는 알려주었다. 온몸으로, 목숨을 바쳐가며, 대를 넘겨 그 상황을 맞닥뜨려 버티고 있는 이들을 만나게 했다. 조용하게, 아름답게, 그리고 슬프게….

영화는 처음부터 내내 자분자분, 담담하게 이야기를 들려준다. 그의 목소리와 시선을 따라 나는 검은 머리 갈매기의 우아한 하강, 도요새의 장엄한 군무, 흰발농게의 분주한 움직임, 황금 모래에서 별처럼 흩어지는 조개들을 보며 경탄했다. 십만 마리의 도요새 떼가 시베리아와 뉴질랜드를 철 따라 오가는 동안 잠시 쉬어가는 곳. 그저 땅만 터전인 줄 알았던 나는 갯벌이 그렇게 많은 생명체의 터전인 것도 처음 알았다. 바로 그 자리에 33km가 넘는 거대한 방조제가 바다를 막았다. 빠졌던 물이 다시 들어오지 않는 자리, 하염없이 물을 기다리다 입을 떡떡 벌린 채 죽은 조개들의 거대한 무덤이 된 장면에서 가슴이 턱 막혔다. 자기들의 터전과 존엄을 함께 빼앗겨 피해자가 되어 살아가는 사람들, 그 사이에서 오랜 세월을 지치지 않고 기록하며, 지키고 있는 사람들이 있다. 아름다운 것을 본 죄인 오동필 단장을 중심으로 한 시민생태조사단. 그들이 수라 갯벌을 가까스로 살려내고 있었다. 2020년 12월부터 하루 두 번 해수유통이 시작된 후, 그들은 죽은 줄 알았던 갯벌 속 생물들이 여전히 바닷물을 기다리며 간신히 연명하고 있었음을 발견했다. 갯벌이 조금씩 살아나고 있다. 많은 법적 보호종 생물들이 마른 갯벌 깊은 곳에서 물을 기다리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물새들이 둥지를 틀고, 흰발농게가 산책을 나와 비단에 수를 놓는 그곳에 다시 검은 재앙이 꿈틀거리고 있다. 이미 많은 생명들의 터전이 된 갯벌을 매립해 새 공항을 만들려는 것이다. 

이제 수라는 더 이상 남의 이야기가 아닌 나의 일이 되었다. 영화 <수라>를 통해 무자비한 개발을 부끄럽게 만드는 경이로운 자연의 힘을 본다. 영화의 포스터에는 하늘을 향해 휴대폰을 높여 들고 있는 청년, 승준의 모습이 있다. 나는 그 모습에서 청마 유치환의 시, ‘깃발’의 한 구절을 떠올린다. ‘소리 없는 아우성’ 이제 우리도 소리 없는 아우성의 깃발을 올려야 할 때다. 소리 없는 아우성을 모아 수라를 살려야 한다.  새만금신공항건설을 반대한다! 

서명하기: bit.ly/새만금신공항취소서명

 

 

안경술 (발도르프 교육활동가)

 사라짐과 살아짐이 공존하는 <수라> 

전인숙(퇴계동)

환경 다큐 <수라>를 보았다. 수라는 군산 갯벌 중의 하나이다. 새만금 간척사업을 위해 방조제를 만들면서 수라는 갯벌로서 기능을 잃어갔다. 영화는 수라의 광활함 안에서 일어나는 변화를 세세하게 보여준다. 생물들이 바닷물을 기다리다 사체가 된 모습, 방조제로 막혔던 물속의 썩은 침전물 등 황폐해진 수라에서 생물들을 관찰하고 기록하며 우리가 전혀 몰랐던 진실을 알려준다. 수라 본연의 모습을 정성스레 한 땀 한 땀 비단에 수를 놓듯 조명했다.

수라 갯벌은 새만금 간척사업을 하며 살아남은 마지막 갯벌이다. 이름도 없던 갯벌을 새만금시민생태조사단 단장이 ‘수라’라는 이름으로 지어주었다. ‘수라’는 ‘비단에 새긴 수’라는 뜻이다. 김춘수의 ‘꽃’처럼 이름을 불러주기 전에는 다만 하나의 몸짓에 지나지 않았다. ‘수라’라는 이름을 불러주었을 때 그 갯벌은 우리의 수라 갯벌이 되었다. 바닷물이 가득 들어오지 않아도 ‘수라’는 갯벌이고 우리에겐 존재만으로 귀하고 아름다운 곳이다.

수라 갯벌의 세상은 사라짐과 살아짐이 공존하는 세계다. 정부는 환경부가 지정한 멸종 위기종과 생태 환경조사를 제대로 하지 않은 채 생물들을 죽음으로 내몰았다. 누구에게도 이익이 없는 잘못된 판단으로 주민들을 대안도 없이 일터에서 쫓아냈다. 적자인 공항이 있음에도 수라 갯벌에 신공항을 짓겠다고 하고 있다. 갯벌은 정화기능을 한다. 이산화탄소를 흡수하고, 산소를 내보낸다. 기후위기에 더더욱 필요한 갯벌이 아닐 수 없다. 10년 동안 버티고 살아낸 흰발농게, 알을 품고 있는 검은머리갈매기 그리고 새끼를 돌보는 쇠제비갈매기 부부는 자신의 터전에서 얼굴을 보여주었다. 생명의 환희가 느껴졌고 감격스러웠다. 간척사업이 진행 중이라 건설 현장의 위협도 있었다. 근처에 미군 기지가 있어 전투기에 새 떼들이 부딪혀도 비폭력 무저항으로 맞서며 살아가고 있었다. 수라는 안타까운 환경에서도 인간의 잘못을 포용해주듯 느리게 아주 조용히 회복 중이었다. 수라의 주인공들 하나하나가 소중하게 느껴졌다.

수라 갯벌을 살리기 위해 새만금시민생태조사단이 20년 동안 자료수집을 하며 기록을 해왔다. 시민들은 각자 자신이 잘할 수 있는 일들에 집중했다. 위대한 시민들의 노력 덕분에 우리는 역사의 진실을 마주하게 되었다. 웅장하고 경이로운 도요새의 군무, 갯벌에 살았던 생명체들의 역동적이고 아름다운 기억은 그립고, 그립고, 또 그리울 것이다. “아름다운 것을 본 죄, 그것도 죄라면 죄다.”라고 심경을 토로한 오동필 새만금시민생태조사단 단장은 아들과 함께 수라 갯벌을 알리고 지키는 데 앞장서 왔다. 그들의 진심과 사랑이 수라의 사계를 지켜주고 있었다. 우리 아이들에게는 아름다웠던 수라의 모습을 언제 보여주게 될지 기약할 수 없음을 알기에 ‘아름다운 것을 본 죄’의 의미에 동조했다. 행복한 기억을 메마르게 하는 슬픈 느낌이었다.

‘수라’는 바다를 바란다. ‘수라’를 알게 된 지금 우리는 잘못된 부분을 바로잡고 수라 갯벌의 회복에 집중해야 한다. 수라 갯벌이 꼭 지켜지기를 반드시 지켜지기를 바란다.                 

  전인숙(퇴계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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