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단발의 여탐정 예순

4천 년 역사의 뒷 이야기로 차상찬은 인조반정 중 조선의 전통적 여인상을 벗어나 반정의 성공에 지대한 공헌을 한 세 여걸을 소개한다. 첫 번째는 반정의 공신인 연평부원군 이귀(李貴)의 딸 예순(李禮順)의 이야기다.  《별건곤》 통권 71호(1934년 3월1일), 6~11쪽의 글을 차상찬읽기 시민모임에서 윤문하여 싣는다.

[전략] 이예순은 원래 외모가 뛰어나고 재주가 비범하여 어려서부터 말을 잘하고 시문에 또한 능한 까닭에 그 아버지에게 여러 남매 중 제일 사랑을 많이 받았었다. 그러나 재자가인은 원래 복이 없고 팔자가 사나운 탓인지 그는 일찍이 김자점의 아우 자겸에게 출가하였다가, 불행하게 청춘에 과부가 되어 적막한 빈 규방에서 가련한 독신의 생활을 하였다. 

우연한 관계로 참찬 오겸의 아들 언관과 비밀리 정을 통하고 세상 사람의 이목을 피하여 멀리 남으로 남으로 경상남도 거창까지 도망하여, 산중 석굴에다 사랑의 보금자리를 정하고, 숨어서 생활을 하다가 호사다마라고 일이 발각되었다. 당시 법을 맡은 사나운 관리는 언관을 잡아다가 부녀를 유괴하여 도주하였다는 죄명으로 곤장을 때려 무참하게 죽였다. 

예순은 자기의 신세와 세상일을 아주 비관하고 생명같이 아끼던 그 탐스러운 머리를 가위로 선뜻 잘라버리고 여승이 되었었다. [중략] 그 절에 있는 하인 놈이 도적질하다가 의금부에 잡힌 까닭으로, 예순까지 연좌죄를 입어 자수궁의 천한 노비로 입적되었다. [중략] 그는 원래 재색이 출중하고 매사 영리한 까닭에 궁에 있는 동안 궁인에게 많은 신임을 받아서, 그 궁인이 무슨 일로 궁중 출입을 할 때면 반드시 그를 데리고 다니게 되었다. 그 인연으로 또한 당시 궁중에서 하늘을 찌르는 세력을 가졌던 김상궁(이름은 개똥이)과 알게 되었다. 

[중략] 바로 반정의 깃발을 들기 몇 달 전(1623년 정월), 이귀 등의 반정음모가 어찌하여 그랬던지 미리 누설되어, 한유상이 아주 급히 왕에게 보고하니, 그때 반정파는 일촉즉발의 위기를 당했다. 이귀는 그때 자기의 딸로 하여금 김상궁에게 말하여 아버지의 목숨을 애걸케 하고, 자기는 한편 아들 형제(이시백, 이시방)를 친히 데리고 명을 기다려 광해군에게 변명의 상소를 하였다. [중략] 이러한 상소를 보고 광해군이 반신반의하는 중에, 그의 가장 신임하는 김상궁이 강하게 변호하여 말하되, 부사 이평산(이귀)은 이 세상의 무명 인물로 가련한 인생이요 김자점은 일개 서생이라 논할 바 못 된다고 하니, 광해군은 그저 웃고 넘겨, 이귀는 화를 면하였다. 

[중략] 그리고 또 한 번은 반정하던 바로 그 당일에 이유성이 그 내용을 박승종에게 말하여 승종이 대궐에 들어가 변고를 알리니, [중략] 대신들과 금부당상이 모두 임금 앞에 모여서 처분을 기다리게 되어, 화가 또한 급박하게 되었다. 그러나 처세에 재빠른 김자점은 음식과 뇌물로 김상궁을 매수하였고 이귀는 또 자기의 딸을 시켜서 그렇지 않다는 것을 김상궁에게 극구 변명하여, 김상궁으로 하여금 광해군에게 또 변명을 하게 했다. 광해군이 김상궁의 말을 곧이듣고 고변장도 본체만체하며 그냥 안심하고 궁인들과 같이 태평하게 연회만 하고 놀다가, 날이 그럭저럭 저물어 궐문을 닫게 되었다. 대신과 의금부 관리들은 부득이 궐문 밖 비변사로 물러나 머물면서 명을 기다리고 있다가, 밤중에 이르러 별안간 반정군이 궁궐을 습격하게 되니, 만사가 다 와해되고 인조 일파의 반정당이 크게 성공을 하게 되었다. 《별건곤》 통권 71호(1934년 3월 1일), 6~11쪽. 

 권태완 (차상찬읽기시민모임)

※이 기사는 지역신문발전 기금을 지원받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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