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천 년 역사의 뒷이야기로 차상찬은 인조반정 중 조선의 전통적 여인상을 벗어나 반정의 성공에 지대한 공헌을 한 세 여걸을 소개한다. 

차상찬이 두 번째로 소개한 인조반정 때의 여걸 조씨는 풍옥헌(風玉軒) 조수륜(趙守倫)의 딸이오, 창강(滄江) 조속(趙涑)의 누님이다. ‘경서와 사기에 능통하여 수염 난 남자를 능히 압도’한 그의 활약상을 올린다.

(2) 규방에 숨은 여참모                                                       

[전략] 그때 포악하기로 유명한 광해군은 일반국정을 그르치고 무고한 신민을 함부로 죽였었는데, 임자무옥사건 때에 조 부인의 부친 풍옥헌 조수륜도 억울하게 죽으니, 조 부인은 아버지가 비명횡사한 것을 크게 원통하게 생각하여, 일주일 동안이나 물 한 모금, 국 한 술을 입에 대지 않고 부르짖으며 통곡하다가 기절까지 하고 다시 살아나니, 보는 사람까지도 눈물을 흘리지 않는 이 없었다. 그는 그렇게 하루같이 삼년상을 치르고 아버지의 원수를 갚으려 이를 갈며, 아우 창강 조속과 몰래 여러 가지 일을 꾸몄다. 또 자기 남편 이후재(李厚載)의 아우 이후원을 지휘하여 김류, 홍서봉, 이서 등 여러 사람과 결탁하여 반정운동을 일으키게 하고, 모든 책략과 계획을 가르쳤다. 그리고 자기는 자기 집 사당 속에 숨어들어 앉아서 군복 수백 벌을 비밀리에 제조하여 반정군에게 제공했다. 그는 반정운동에 엄연히 여류참모장이 되는 동시에 군수품 보급책임자가 되었다. 반정운동에는 물론 표면에 나선 여러 남성 정객들의 공적이 많았지만, 이면에는 이 숨은 여정객의 공적이 컸다는 것을 잊어서는 안 될 것이다. 그의 남편 형제와 친정 아우가 반정공신이 된 것도 또한 그의 부추김과 지도를 받은 것이었다. 그러므로 계해반정 이후에 여러 훈구대신들이 모여서 무슨 일을 의논할 때면, 반드시 먼저 그에게 자문을 구하고 또 그가 한 번 이리저리하라고 지도한 일이면 무엇이나 실패된 일이 없으니, 일반이 모두 그를 흠모하고 존경하여, 평소 여러 공신들이 이후원, 조창강을 남다르게 대우하였다.

[중략] 그리고 그의 집 노비 중에 은세라는 사람이 있었으니 그는 사람됨이 재간과 능력이 있고 사리가 명백하여 그가 무엇을 시키면 조 부인보다 한층 더 일을 잘 처리하니, 그때 사람들이 모두 그 주인에 그 노비라고 칭찬하였다. 정묘호란 때는 그가 가족을 데리고 충청도로 피난을 가고 병자호란 때는 또 전라도로 피난을 하였는데 모든 일을 그 하인에게 맡길 때, 부인은 미리 그 하인을 불러서 산천의 험함과 평탄함, 도로의 원근, 여관의 유무 등을 일일이 가르쳐서 이리저리하라고 지휘했다. 그 하인은 또 그 부인의 지휘를 받아서 한 티끌도 그릇됨이 없게 하니, 난리 중에 먼 천 리 길을 왕복하여도 조금도 궁핍함과 낭패된 일이 없었다.

부인은 일찍이 한 아들을 낳았으니 이름은 형(逈)이었다. 그의 아우 창강에게 묻되, 이 아이가 장래 자라서 집안을 이어서 지킬 만하냐 하였더니, 창강은 대답하기를, 이어서 지킬 뿐만 아니라 장래에 복과 영화가 무궁하리라 대답했다. 그러자 부인은 단산을 결심하고 지 씨와 라 씨의 양갓집 두 딸을 택하여 자기 남편의 첩으로 삼았다. 그 뒤에 그의 아들 이형은 과연 아들 팔 형제를 낳아서 모두 현명하게 키우고 또 이십여 손자를 보았으니, 지 씨와 라 씨가 그들을 보육하는데 또한 공이 많았었다. 그 후 그의 손자 녹천 이유(李濡)대에 이르러서 조씨 부인의 비를 무덤 앞에 만들어 세우고 그 사실을 기록하니, 세상 사람들이 그의 갸륵함을 잘 알게 되었다.

(《별건곤》 통권 71호, 1934년 3월 1일 6-11쪽) 차상찬 읽기 모임에서 윤문     

권태완 (차상찬읽기시민모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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