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글은 차상찬이 1930년 5월 《별건곤》(통권 28호)에 쓴 것을 <차상찬읽기모임>에서 현대어로 옮긴 것이다. 1894년 청일전쟁 이후 일제의 국권침탈이 노골화되던 중 1895년 8월 20일 명성황후시해사건과 연이은 단발령으로 민심은 더욱 나빠졌다. 이를 기회로 춘천에서는 정인회가 군인 성익환·상인 박현성 등을 주축으로 의병을 조직하고 첫 의병장으로 이소응을 추대하였다. 이들은 1896년 1월 18일 새벽, 강원도 관찰부와 춘천군 관아를 점령하고 의병을 모집하니 불과 3일 만에 그 수가 5~6천 명에 달하였다. 차상찬은 9세에 고향인 ‘자라우마을(현 춘천 송암동)’에서 을미의병을 직접 경험하였으며 그 이야기를 <관동병란 치르던 이야기>에서 자세히 서술하였다.

[전략] 그때 내 나이가 겨우 아홉 살이었지만 어찌나 인상이 깊이 박혔던지 지금까지 눈앞에 환히 보이는 것 같다. 그때 그 의병의 장수로 말하자면 나의 자형되는 그해 27세의 청년 정인회였는데 그는 본래 큰 뜻이 있는 강개한 선비였다. 그때 나라의 일이 날로 그르쳐감을 보고 항상 비분개탄 하던 차에 을미년(1896년) 8월 20일에 민비시해사건이 돌발하니 그는 더욱이 분개하여 당시 친일파 김홍집 내각과 또 그 사건에 관계된 일본 사람들의 죄상을 밝히고 무력으로 벌하기로 결심하고 비밀리 동지와 결속하여 기회만 기다렸다. 마침 그해 음력 12월에 단발령이 내려서 수도와 지방 각지에서 인심이 크게 동요되는 중 특히 춘천 관찰사 이근명과 참서관 정필원은 그때 인심이 어떠한지는 조금도 생각하지 않고 정부의 명령대로 자기네가 먼저 단발하고 또 일반 군경과 기타 관리, 인민은 모두 1896년 양력 1월 1일(건양원년)을 기하여 삭발하게 하되, 만일 듣지 않으면 강제로 삭발을 한다고 훈령하니 인심이 크게 흉흉하였다. 그 중에도 군경이 더욱 불안하였었다(그때 춘천의 군대는 구식병정이 삼백 명·포수 사백 명, 약 칠백 명). 이때 정인회는 그것을 제일 좋은 기회로 생각하고 먼저 군인 중 다소 신망이 있는 성익환과 약속하여 군대에 연락하고 일방으로 유림에 비밀 발통(이른바 사발통문)하여 유생을 망라하며 또 장사하는 사람 중 용력과 담력이 있기로 저명한 박현성과 뜻이 통하여 시장 사람들을 연결하였다. 

[중략] <국모보수, 단발반대, 외인퇴축> 3대 강령의 격문을 강원도 각 군과 경기도 일대에 전하여 선포하고 방방곡곡에 고시를 붙여 민병을 크게 모집하니 불과 3일 사이 그 수가 오륙천에 달하였다. [중략] 나는 그때 비록 나이가 어렸으나 그 여러 사람들이 총을 메고 활기 있게 모여 다니는 것이 어찌나 좋았던지 글 읽는 것을 그만두다시피 하고 매일 읍내로 들어가서 그 구경을 하였다(우리 집에서 읍이 약 7리는 된다). 그 중에도 제일 인상이 깊은 것은 위에서 말한 박초관의 머리를 춘천군 관아 대문 위에 짐승의 모가지처럼 베어 단 것과 민두호의 생사당을 불 지르고 군대들이 들어가서 난도로 그 집 세간을 산산이 부수고 수십여 개 되는 김칫독과 장 항아리에다 똥과 오줌을 마구 누었던 것이다. 그리고 평소에 양같이 유순하고 말 한마디도 못 하는 농민들이 그때에는 어찌 그렇게 용감스럽고 무섭던지 지금 생각해도 매우 흥미롭다.

다음 호에서 <관동병란 치르던 이야기2>가 이어집니다.

박명희 (차상찬 읽기 시민모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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