춘천의병에 대한 소문이 경성까지 전해지자 정부에서는 조인승을 관찰사로 파견한다. 그러나 그는 춘천으로 들어오지 못하고 가평에서 머물며 형세를 지켜본다. 이 소식을 의병들은 먼저 알고 가평을 선공격하여 조인승을 붙잡아 처형한다.

그(조인승)를 잡아 오던 날이야말로 참 장관이었다. 무슨 큰 대첩의 개선날과 같이 각 군인들이 어깻바람이 나서 기쁨 충만하게 뛰놀고 돌아다님은 물론이고, 읍촌의 남녀노소들은 역적놈을 잡아 왔느니 개화꾼을 잡아 왔느니 하고 떠들며 인산인해가 되어 구경을 갔었다. 군인들은 그의 일행을 잡아다가 춘천읍 약사천변(예전 참형장) 모래사장에다 놓고는 에워싸고 있더니 조금 있다가 의병대장의 사형선고문을 가진 어떤 군관이 와서 조 씨를 향하여 낭독하고 그의 인수관복은 국가의 것이니 함부로 굴 수 없다 하고 의병을 시켜 거두게 하고 일행 십여 명 중에 수행원과 그 아래 사람은 다 풀어주고 조인승과 신정만은 결박하여 앉혀 놓은 다음에 수십 명의 군병을 호령하여 일시에 사격하니 불과 한두 방에 두 사람의 형체는 화약 연기에 싸여서 보이지도 않고 불꽃만 번쩍번쩍하였었다.

그리고 그 기세를 몰아 서울로 진격하던 중 가평 벌업산에서 서울에서 파견된 경군을 맞아 싸우던 중 패배하고 만다. 의병들이 쓰던 화승총은 비가 오면 불조차 붙이기 힘들었기 때문이다. 그날 이후 춘천에서는 아리랑 타령이 유행하였다. 패한 의병들은 강릉·충청 방면으로 흩어져 그곳 의병에 합류하여 투쟁을 이어갔다.

그 뒤에 의병들은 형세가 더욱 커지므로 일거에 경성을 습격하려고 음력 2월 1일을 점하여 경성을 향해 출발하였다. 그때의 광경이야말로 참으로 장관이었다. 사람 수가 아무리 많아도 원래 훈련이 없던 오합지졸인 까닭에 줄과 열이 정돈되지 못한 것은 물론이고 옷 색깔도 가지각색이었다. 명색이 대장이란 사람은 사대부들이 입던 높은 관과 넓은 띠를 한 복장에 사인교에 양산을 받고 앞뒤에 병정과 포수가 호위하고 가며, 그 외 장교는 대개 말과 노새, 당나귀 등을 탔는데 그중 당나귀가 제일 많아서 울 때면 이곳에서도 끙까끙까 저곳에서도 끙까끙까 하고, 깃발은 마치 서낭대 같은 기에다 국적토벌·국모보수·배양척왜·단발불복 등 기기한 문자를 써서 들었고 앞에는 나팔·북·삼현육각 등을 두드리며 나아가니 소리가 천지를 진동하고 창검은 일월을 희롱하였다. 군병을 위시하여 군량미를 운반하는 말의 짐바리까지 어찌나 수가 많았던지 춘천읍에서 오육 내지 칠팔 인씩 일렬을 지은 것이 가평군 경계까지 약 오십 리의 장사진을 쳤었다. 

[중략] 그때 춘천에는 이러한 아리랑 타령이 유행하였었다. 

춘천아 봉의산 너 잘 있거라/ 신연강 배터가 하직일다/ 귀약통 납날개 양총을 메고/ 벌업산 접전에 승전을 했네/ 우리나 부모가 나를 기를 제/ 성대장 주자고 날 길렀나 [후략]

춘천 을미의병은 그 기세가 대단하였다고 한다. 흔히 춘천의 의병활동 하면 유인석 장군을 손꼽는다. 그러나 이 글을 통해 알 수 있듯이 정인회·이소응·성익환 등 최전선에서 목숨 걸고 활약한 인물들이 있었다. 역사는 이들의 이름도 잊어서는 안 된다.

박명희 (차상찬 읽기 시민모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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