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31년 2월 21일, 춘천공회당서 공연…“공전절후의 대성황”

1929년 125평으로 지어진 춘천공회당. 사진=춘천디지털기록관.

 

1931년 2월 21일 춘천에서 세계적인 무용가 최승희의 공연이 성황리에 열렸다. 《매일신보》 강원지국과 《동아일보》 춘천지국이 공동으로 춘천공회당에서 개최한 공연은 말 그대로 입추의 여지도 없이 대만원을 이루었다. 《매일신보》는 그해 2월 26일 기사에서 당시 상황을 다음과 같이 보도했다.

“개회 정각 1시간 전에 벌써 사방에서 운집한 관중으로 인하여 그처럼 큰 공회당도 문자 그대로 입추의 여지 없이 메어버리어 그 후로 속속 몰려드는 관중은 아직도 문밖에서 물결치고 있었으나 부득이 만원으로 입장을 시키지 못한 수백 관중은 혹은 문을 차고 들이밀며 혹은 창문을 열고 뛰어드는 판에 춘천경찰서로부터 10여 명 정사복 경관이 출동하여 그들을 위무하여 돌려보내기에 노력하는 등 실로 공전절후의 대성황을 이루었다. 무용은 ‘그들은 태양을 구한다’를 비롯해 ‘인도인의 비애’, ‘정토의 무희’, ‘방랑인의 비애’, ‘엘레지’의 독무, ‘애급풍경’, ‘하와이 세레나데’ 등 3부로 나누어 15종을 연무하여 혹은 그윽한 애수로 관중의 가슴을 졸이게 하며, 혹은 속삭이는 로맨스의 쓰고도 달콤한 맛으로 마음을 흔들리게 하며, 혹은 쾌활하고 익살궂은 춤으로 사람을 웃겨 완전히 관중의 온 정신을 ‘캐치’하여 이리저리 마음대로 질질 끌고 다니며 여지없이 매혹시켜 버렸다.” 

질서유지를 위해 경찰관까지 동원해야 할 정도로 많은 인파가 몰렸는데, 이는 춘천에서는 이전에도 없었고 앞으로도 없을 실로 ‘공전절후空前絶後’의 대성황이었다고 했다. 일제강점기에 ‘전설의 무용가’, ‘전설의 무희’, ‘동양의 진주’, ‘조선이 낳은 세계적 무용가’라는 찬사를 한몸에 받았던 최승희. 그는 식민지 조선에 태어나 춤 하나로 세계를 누볐다.

《조선일보》, 1938년 2월 26일.

 

1938년 2월 26일, 《조선일보》는 “태평양 건너서의 미스 최승희, 전미를 석권하는 그 인기”라는 타이틀로 미국 무대에 데뷔한 최승희의 공연 소식을 전했다. 1938년 1월 22일 ‘상항桑港(샌프란시스코)’에 도착해 첫 공연을 성황리에 마치고 2월 2일에는 할리우드에서 역시 성공적인 무대를 선보인 뒤 2월 3일 뉴욕으로 갔다. 이후 21일부터 뉴욕에서 한 달 동안 공연을 이어갔는데, 이러한 장기 공연과 흥행은 동양인으로서는 최승희가 처음이었다고 한다. 조선 사람으로서 미국에서 이만한 인기를 누린 것은 권투의 서정권뿐이라고도 했다.

1911년 홍천에서 태어난 최승희는 1926년 숙명여고보를 졸업한 후 무용가가 될 생각에 일본으로 건너갔다. 1926년 5월 일본 현대무용의 선구자인 이시이 바쿠(石井漠)를 찾아가 3년 동안 춤을 배운 그는 1930년 2월 경성공회당에서 한국인 최초의 독자적인 춤 공연인 제1회 최승희 무용발표회를 열었다. 공연을 성공적으로 마친 후 그는 조선 춤의 일인자인 한성준을 찾아 장구춤·부채춤·승무·칼춤·가면춤 등 조선의 전통 춤을 배웠다. 그는 조선 고유의 춤사위를 바탕으로 현대무용을 접목해 그만의 독창적이고 예술적인 춤 세계를 창조했다.

1931년 5월 사회주의 경향의 문학청년 안막과 결혼한 후 1933년 다시 일본으로 간 최승희는 ‘거친 들판에 가다’, ‘칼춤’, ‘승무’ 등 조선의 정취를 제대로 살린 공연으로 본격적인 ‘최승희 시대’를 열었다. 1936년 말부터 4년간 세계무대로 진출한 그는 미국과 유럽을 순회하고 다시 뉴욕과 중남미를 거쳐 1941년에 서울로 돌아왔다. 최승희는 당시 식민지 조선의 많은 사람에게 민족적 자긍심을 심어줬다.

최승희는 중일전쟁 이후 일제의 강압에 따라 일본에 협력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 친일행적으로 남편 안막, 오빠 최승일과 함께 월북했다. 최승희는 1955년 북한에서 인민배우 칭호까지 얻었지만, 북한 정권의 숙청 바람을 피할 수는 없었다. 남로당 출신 사회주의자들과 함께 남편 안막이 종파분자로 숙청되자 최승희무용연구소도 폐쇄됐다. 1959년 다시 무대에 복귀하기도 했지만, 1967년 숙청된 최승희는 가택연금 상태에서 1969년 8월 8일 사망했다.

장고춤을 추는 최승희. 《경향신문》, 1988년 12월 24일.

 

전흥우 이사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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