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화존 북산면 추곡리 독자.
김화존 북산면 추곡리 독자.

늙음아, 너 늙음을 알아? 알지. 때라는 걸. 누군가 그랬어. 때를 알면 삶이 보인다고. 또 누구는 때를 알고 떠나는 사람의 뒷모습은 아름답다고 했어. 늙은이는 저녁노을에서 나를 보는 사람이야. 어디쯤인지 빨갛게 물드는 노을에서 나를 보기도 해. 지난 걸음걸음에 무엇을 심고 어떤 얘기를 쓰며 여기 왔는가. 보람을 심었다면 자랑스러움이 자랐을 거고, 그저 생각 없이 왔다면 부끄러움이 가득하겠지. 어쩌다 부끄러운 자리에 선 걸 보거든 씁쓸한 눈물 한 방울 툭! 잊어버려. 지난날에 잡히면 오늘이 무거워. 새로운 오늘을 보람있게 살아. 다시 울지 않도록.

어떻게? 예로 살아. 쉬지 말고 배우고 선택하고 책임을 져. 예는 배려·공감·겸손이며 질서야. 순리이기도 하지. 모든 걸 아끼고 귀하게 여기는 마음으로 높여 모시는 것, 나를 비운 가슴에 너를 품는 거야. 여기에 신뢰가 자라고 너와 나는 둘이 아니라 하나, 곧 우리가 되는 거야. 배움이란 날마다 새로워지고 자라나는 거지. 풀이 자고 나면 쑥쑥 자라 있는 것처럼. 옛사람들은 ‘선비란 사흘을 보지 못하면 눈을 크게 뜨고 봐야 한다’고 했어. 배우지 않으면 고인 물과 같아. 썩고 말라가는 나무와 같지.

배우기에 가장 좋은 게 책하고 신앙이야. 나날이 새롭고 보이지 않던 세계를 보게 하지. 혼자라도 외롭지 않고 늙는 줄 몰라. 퇴계 이황은 배우는 즐거움을 이렇게 노래했어.

우부(愚夫)도 알며 하나니 그 아니 쉬운가.

성인(聖人)도 못다 하시니 그 아니 어려운가.

쉽거나 어렵거나 중에 늙는 줄을 몰라라.

많이 읽고 쓰고 생각해. 그 눈에 곱게 물든 노을에 내가 있어. 선택이 뭐냐고? 뉘* 고르기지. 하얀 쌀 한 움큼에서 뉘 한 알 골라내기야. 많고 많은 길에서 내 길은 어딘가, 쌔고 쌘 일 중에서 내가 해야 할 일은 어떤 일인가, 누구를 만나고 어디를 가야 하는지. 어쩜 산다는 게 뉘 고르기 아닐까? 어렵지? 꼭 어렵지만은 않아. 책과 신앙으로 바탕을 다지면 가야 할 길이 뚜렷하고 해야 할 일이 앞에서 손짓하거든. 돌아보지도 궁금해하지도 말고 곧장 가. 돌이 있으면 치우고 막히면 길을 내며 가. 그러면 뒷세대에 부끄럽지도 않고 자랑이지. 책임이 부끄럽지 않은 삶이 이런 거 아닐까?

가노라면 끝이 있어. 길이 끝난 게 아니라 삶이 거기까지인 거지. 거기 앉아 쉬어. 고요히. 늙음아, 귀 좀! 죽음을 두려워 말아. 죽음은 늙음에게 멋진 ‘마침’이야. 곱디고운 노을처럼!

모진 세월 가고

아아 편안하다 늙어서 이리 편안한 것을

버리고 갈 것만 남아서 참 홀가분하다

- 박경리, '옛날 그 집'에서

*뉘 : 찧지 않아 겉껍질이 벗겨지지 않은 채 쌀 속에 섞여 있는 벼 알갱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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