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성여고보 사범과 졸업 후 1920년 일본 유학 떠나기 전

앨범 〈사의 찬미〉 녹음 직후 찍은 윤심덕 최후의 사진. 앞에 앉은 사람이 윤심덕이고 뒤에 서 있는 사람은 그의 동생인 윤성덕이다. 《조선일보》, 1926년 8월 13일 기사 편집.
앨범 〈사의 찬미〉 녹음 직후 찍은 윤심덕 최후의 사진. 앞에 앉은 사람이 윤심덕이고 뒤에 서 있는 사람은 그의 동생인 윤성덕이다. 《조선일보》, 1926년 8월 13일 기사 편집.

광막한 광야에 달리는 인생아

너의 가는 곳 그 어데이냐

쓸쓸한 세상 험악한 고해를

너는 무엇을 찾으러 가느냐

눈물로 된 이 세상은

나 죽으면 고만일까

행복 찾는 인생들아

너 찾는 것 허무

윤심덕. 출처=다음백과.
윤심덕. 출처=다음백과.

1926년 8월 1일, 한국 최초의 소프라노이자 ‘악단의 여왕’으로 불린 윤심덕이 오사카 닛토 레코드사에서 ‘사의 찬미’가 담긴 음반을 녹음했다. 이 노래는 루마니아 작곡가 이오시프 이바노비치의 ‘다뉴브강의 잔물결’을 편곡한 것으로 윤심덕이 직접 가사를 썼다. 그러나 이틀 뒤인 8월 3일, 갑작스럽게 귀국을 결정하고 시모노세키에서 관부연락선에 몸을 실은 윤심덕은 4일 새벽 연인으로 알려진 김우진과 함께 배에서 사라졌다. 당시 거의 모든 신문이 이들의 실종을 현해탄玄海灘에 함께 투신한 ‘정사情死’로 보도해 세기적 스캔들scandal이 됐다. 그로 인해 음반은 10만 장이 넘게 판매됐다. 당시에는 상상하기 어려운 판매량이었다.

이들의 실종은 많은 논란을 일으켰다. 김우진과 윤심덕의 가족들은 ‘정사’는 물론이고 자살 자체를 부정했다. 김우진은 독일 유학을 준비 중이었고, 윤심덕은 8월 5일 미국으로 출국할 예정이었던 동생 윤성덕의 미국 유학비를 마련하기 위해 애쓰던 중이었다. 두 사람이 진짜 연인관계인지에 대해서도 의문이 잇따랐다. 더욱이 함께 정사를 선택할 이유가 없었다는 것.

이러한 의문은 죽음을 위장하고 제3국에 생존해 있다는 설에서부터 실족 등에 의한 ‘사고설’, 그리고 계획적인 ‘타살설’까지 다양한 논란의 불씨가 됐다. 실제로 1931년 이탈리아에서 김우진과 윤심덕이 잡화점을 운영하는 걸 봤다는 목격담까지 나오기도 했다. 이에 김우진의 동생은 총독부를 통해 이탈리아 일본대사관에 확인을 요청했지만, 찾지 못했다는 통보를 받았다. 한편, 음악평론가 강헌은 당시 윤심덕의 음반을 녹음한 닛토 레코드사의 계획적인 살해라는 음모론을 제기했다. 이 레코드사가 당시 국영 축음기회사인 닛지쿠의 신생 자회사였으며, 조선에 레코드와 축음기를 대량으로 팔기 위해 기획됐다는 것이다. 원래 부르기로 예정된 노래가 아니었는데 갑자기 노래가 추가됐고 음반의 타이틀곡까지 됐다는 것.

윤심덕은 1897년 평양에서 태어났다. 만 스물아홉에 세상을 떠난 것이다. 어려서부터 성격이 지나치게 활달해 평양말로 ‘왈녀’라는 별명을 가질 정도였다. 평양숭의여학교를 졸업한 뒤 평양 광혜여병원 의사 ‘홀’의 권고로 의사가 되기 위해 평양여고보를 졸업했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의사는 성격에 맞지 않아 서울로 가서 경성여고보 사범과를 졸업했다.

《매일신보》, 1920년 5월 4일.
《매일신보》, 1920년 5월 4일.

윤심덕에 대해 검색하면 거의 모든 백과사전에서 윤심덕이 경성여고보 사범과 졸업 후 일본 유학을 떠나기 전에 원주공립보통학교에서 교원을 했다고 소개하고 있다. 그러나 당시 신문 보도 등에 따르면 윤심덕은 춘천공립보통학교에서도 교원을 지낸 것으로 확인되고 있다. 

윤심덕이 춘천공립보통학교 훈도로 등재돼 있는 1920년 직원록.
윤심덕이 춘천공립보통학교 훈도로 등재돼 있는 1920년 직원록.

“4월의 신학년부터 동경음악학교에 입학 허가를 얻은 두 명의 조선 부인이 있는데, 그중 한 사람은 총독부에서 추천한 관비생官費生인데 이름은 윤심덕이요, 평양의 목사 윤석호 씨의 영랑으로 동지 고등보통학교에서 경성여자고등보통학교의 사범과를 졸업하고 강원도 춘천공립보통학교에서 교편을 잡고 있던 바 금회 선발되어 경성에서 시험에 합격되어 갑종 사범학교에 입학이 되었더라…”

1920년 5월 4일, 《매일신보》가 “동경음악교에 입학된 조선 두 부인”이라는 제목으로 보도한 기사의 일부다. 이 같은 사실은 《동아일보》 1925년 8월 2일 기사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한국사데이터베이스의 조선총독부 ‘직원록’을 보면, 윤심덕은 1919년에는 횡성공립보통학교 훈도訓導로, 1920년에는 춘천공립보통학교 훈도로 이름이 등재돼 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

조선총독부 관비 유학생으로 뽑혀 도쿄 우에노(上野) 음악학교 성악과에 입학한 후 도쿄 음악학교를 졸업한 윤심덕은 1923년 학업을 마치고 돌아와 그해 6월 동아부인상회 3주년 창립 기념 음악무도대회 독창 공연을 시작으로 성악가로서 본격적인 활동을 시작했지만, 생계유지가 어려워 음악 교사, 극단 배우, 대중가요 가수로도 활동하기도 했다.

윤심덕과 김우진이 로마에서 잡화상을 경영한다는 소문에 대해 보도한 《동아일보》 1931년 10월 8일 기사.
윤심덕과 김우진이 로마에서 잡화상을 경영한다는 소문에 대해 보도한 《동아일보》 1931년 10월 8일 기사.

윤심덕과 김우진이 관부연락선 도쿠주마루(德壽丸) 선상에서 대한해협에 몸을 던졌다는 그해로부터 100년 가까운 세월이 지났지만, 그들의 스캔들은 지금까지 많은 사람의 입에 자주 오르내린다. 진짜 자살인지 위장 자살인지, 또는 계획적인 타살인지 알 수는 없지만, 그 자체로 세인의 관심을 끌 만한 이야깃거리라 여러 영화와 연극의 단골 소재가 되기도 했다.

웃는 저 꽃과 우는 저 새들이

그 운명이 모두 다 같구나

삶에 열중한 가련한 인생아

너는 칼 위에 춤추는 자로다

‘사의 찬미’ 2절 가사처럼 모든 생명의 운명은 다 같다. 어쩌면 모두가 죽음이라는 칼 위에서 춤추는 가련한 신세일지 모르지만, 저마다 삶에 열중한다. 삶을 누리기도 바쁜데, 굳이 죽음을 찬미할 필요까지야 있을까.

전흥우(발행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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