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날 설렁탕은 많은 음식 중의 하나로 알고 있으며, 누구나 1년에 한두 번씩은 사 먹는 맛있는 음식이다. 1920년대에는 ‘경성의 패스푸드’니 ‘조선 최고의 인기 음식’이니 ‘일제강점기 조선을 들썩이게 한 음식’이니 하여 이름이 자자했었다. 그러면 설렁탕에 얽힌 여러 실화를 통하여 당시 사회의 모습을 엿보기로 하자.

1923년 《개벽》은 <조선문화의 기본조사>를 연재했다. <조선문화의 기본조사> ‘경성호’는 ’《개벽》 제48호에는 실렸는데, 그중 필자명이 없는 ‘경성의 특산’이라는 글에는 음식을 비롯해 다섯 분야의 명물을 소개하는 ‘경성명물집’이 들어있다. 그중 음식의 명물로 설렁탕이 다음과 같이 소개돼 있다.

시골 사람이 처음으로 서울에 와서 설렁탕집을 지나가다가 털이 그대로 있는 삶은 소머리가 설렁탕 광고를 하는 듯이 채반 위에 놓여있고, 시골에서는 아무리 가난한 집이라 하더라도 잘 사용하지 않는 오지 뚝배기 설렁탕 그릇이 놓여있는 것을 보며, 확 풍기는 누린 냄새를 맡으면 소위 한 나라의 수도라는 서울에도 저런 더러운 음식이 있으며 저것을 그래도 누가 사 먹나 하고 코를 외로 저을 것이다(머리를 절레 흔들 것이다).

그러나 시험 삼아 먹어 본다는 것이 한 그릇 두 그릇 먹기 시작을 하면 누구나 재미를 들여서 집에 갈 노잣돈이나 자기 마누라의 치맛감 사 줄 돈이라도 (설렁탕)을 사 먹지 않고서는 견디지 못할 것이다. 값이 싼 것도 싼 것이지만(보통 한 그릇에 15전, 고기는 돈을 내는 만큼 더 준다), 맛으로 든지 영양으로 든지 알맞은 가격이다.

서민들의 생생한 모습으로 신세대의 음식 문화, 소문난 맛집들도, 맛있는 음식이 대중화되는 것도 오늘날과도 크게 다르지 않음을 알 수 있다.

예로부터 서울의 폐병 환자와 중병을 앓고 난 사람들이 이것을 먹고 원기를 회복하는 것은 물론이고 요즈음에 소위 신식결혼을 하였다는 하이카라 청년들도 이 설렁탕이 아니면 아침저녁 식사를 굶을 지경이다. … 요사이 소위 신식여자들은 대개가 밥을 잘 지을 줄 모르고 또 아침이면 늦잠 자고 저녁에는 외출이 많기 때문에 시간에 출근하는 남편이 설렁탕으로 신세를 지는 일이 드물게 있다 … 이전에는 남문(南門) 밖 잠배(자암동) 설렁탕을 제일로 쳐서 동지섣달 추운 밤에도 십여 리 밖에 있는 사람들이 마치 여름날 정릉 물맞이나 악바위골 약수를 먹으러 가듯이 서로 먼저 가려고 다투었지만, 지금은 시내 각 곳에 설렁탕 집이 생긴 까닭에 그것도 인기를 잃었다.

시내 설렁탕 집도 숫자로 치면 꽤 많지만, 그중에는 종로 이문안 설렁탕집이라든지 장교 설렁탕집, 샌전(장터) 일삼 설렁탕집이 전날 잠배 설렁탕의 명성을 이어받은 듯하다. 그렇다고 시골에서 올라온 사람은 설렁탕에 함부로 반하지는 마시오. 충청도 서산의 모 청년처럼 사백 석을 추수하는 논밭을 다 팔아먹고는 설렁탕이 아니라 ‘날탕’ ‘패가탕’이라고 후회하기 쉬울 것이다.           

이건천(차상찬읽기시민모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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