류재량 전 광장서적  부사장.
류재량 전 광장서적  부사장.

거창하게 얘기하자면 사반세기를 일한 직장생활이 실패로 끝났다. “민족중흥의 역사적 사명” 같은 건 없었지만, 지역문화 창달이라든지 ‘문화 사랑방’이라는 자부심 따위의 소명이 박봉의 세월을 견디게 해준 이유쯤이 되었는데, 서점도 망하고 나도 대충 경제적으로 망했다.

맞다. 부도난 ‘광장서적’ 얘기다. 쉬는 날 오후에 부도 소식을 들었는데 하필 당일 저녁에 민주노총이 주관하는 민중대회에서 ‘호수를닮은사람들’ 멤버로서 노래공연이 예정돼 있었기에 참말로 웃다가 울다가 노래하다가 그랬다.

종이책 유통시장은 완벽한 사양산업이다. 스마트폰이 처음 나왔을 때, 서적 생태계는 이미 죽음을 예고했다. 스마트한 삶의 양식에서 책은 지위를 상실했다. 알고리즘은 지루함, 침묵의 공백을 허용하지 않는다. 

스마트한 지배는 지속적으로 우리의 의견, 필요, 선호를 소통하라고, 삶을 서술하라고, 게시하라고, 공유하라고, 링크로 걸라고 요구한다. 이때 자유는 억압되는 게 아니라 혹사된다. 자유가 결국 통제와 제어로 전복되는 것이다. 소통은 점점 더 외부에 의해 유도된다. - 한병철, 《서사의 위기》

서점이 망했다고 저주를 퍼붓는 건 아니다. 스마트한 세계가 지배를 획득하기 전에 이른바 ‘재미론’이 도서 생태계에 화두가 된 적이 있었는데, 거칠게 정리하면 책을 스마트폰보다 재밌게 만들든지 파피루스의 질감을 완벽히 구현하든지 정도의 논쟁이었다. 이젠 그런 성질의 것이 아닌 세상이 되었다. 자신은 그저 노는 중일 뿐이라고만 믿는 ‘포노 사피엔스’는 실제로는 완전히 착취당하고 통제당하고 있으며, 놀이터로서의 스마트폰은 디지털 파놉티콘임이 드러났다. 잠깐 앉아서 유튜브 쇼츠를 보라. 눈뜨고 시간을 강탈당한다. 놀라움과 자극의 연속에 서사는 없다. 알맹이 없는 ‘텅 빈 삶’이다. 주목 경제에 환금성이 부여된 이후 온갖 사이버 영역에서 펼쳐지는 극단적 자극의 향연. 곰곰이 생각해 보자. 에로티시즘은 과정이라는 게 있지만, 포르노는 바로 간다.

실업자가 된 이후로 이상한 일이 계속됐다. 만나는 사람마다 내게 미안하다고 했다. 종이 쪼가리가 된 쿠폰이며, 이래저래 사회적 물의를 셈해 봐도 송구한 입장은 되레 내게 있어야 맞다. 피해자가 가해자를 위로하는 이 이상한 이야기의 본질에서 희망을 본다. 정보와 달리 지식은 순간을 넘은 이야기로 가득하다. 성찰과 여백, 내 생각과 느낌을 말하는 일, 과거를 곱씹어 나를 발견하는 것! 경제적 삶은 비루해졌으나 나는 서사를 얻었다. 나는 망했으나 망하지 않았고 앞으로 계속 망할 의향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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