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은 번외로 정선아리랑 초기 연구자에 대한 이야기를 하려고 한다. 춘천학연구소에서는 춘천인 구술채록 아카이브 사업을 하고 있다. 현재 춘천시민 219명의 삶을 기록했고, 서병하 선생을 만난 것도 이 사업을 통해서였다. 그는 1931년 충남 당진군에서 태어나 1945년 철도학교를 거쳐 서울대 사범대를 졸업했다. 1961년에 춘천사범대에 자리 잡고 퇴임 후 현재까지 춘천에 살고 있다. 

정선아리랑 연구를 어떻게 시작하게 됐는지 묻자 그는 춘천에 와서 정선아리랑에 대한 소문을 많이 듣게 되었기 때문이라고 했다. 민요 연구는 음악학·어학·문학이 필요하고 당연히 현장 조사가 먼저라고 생각해 조사팀을 꾸렸다.

“문학은 내가 담당하고, 박재훈 교수가 강릉교육대에 있던 그 박재훈 교수가 음악과 가락을 담당하고, 원훈의 교수가 그 어사(語史) 그걸 담당하고…”

이렇게 셋이 정선 지역 답사를 시작했다. 1960년 후반 당시 정선군은 적극적으로 조사에 협조했다. 교수 셋이 찾아갔기 때문이기도 하고 그 당시 정선은 외진 산골이었기 때문에 정선아리랑을 조사하는 것 자체가 반가웠기 때문이기도 했다. 세 명의 연구자는 정선의 여러 마을을 다니면서 마을 사람들을 모아 놓고 조사했다. 여름날 일이 끝날 무렵 마당 넓은 집에 막걸리와 메밀부침을 잔뜩 준비해 사람들을 모으면 밤새도록 소리를 녹음할 수 있었다. 세 사람은 노래가 끊기지 않게 카세트테이프를 갈아 끼우는 데 초집중을 했고 3년 동안 이렇게 조사한 카세트테이프가 산처럼 쌓였다. 조사한 자료를 정리할 때도 세 연구자는 함께 모여 앉아 정리했다.

“왜 그런가 하면 혼자 받아쓰면은 빠뜨리는, 급하면 안 되는 데가 있으니까. 셋이 해서 이렇게 하면은 다 채록할 수 있거든.”

이 말은 무척이나 감동이었다. 세 사람이 옹기종기 앉아서 하나의 노래를 빠뜨리지 않으려고 적고 비교하면서 노랫말을 정리하는 모습은 같은 조사자로서 상상만해도 뿌듯하고 자랑스럽다. 이렇게 훌륭한 자세로 노력을 기울여 후학을 길러내고 자료를 모아줘 지금의 나 같은 사람이 아리랑을 연구할 수 있는 것이라 믿기 때문이다. 

그는 사범학교 선생에서 교육대학 교수를 거쳐 춘천교대 초대 총장까지 역임했다. 수많은 제자를 길러내면서도 누구 한 사람 편애하지 않고 똑같이 대하려고 노력했다. 정선아리랑 연구만 해도 정확한 자료를 녹음하려 애썼다. 

“근데 그걸 엉성하게 해서 그저 잔뜩 갖다가 늘어만 놓으면 되는 거 아니거든. 그러니까 학문이라는 건 그렇게 힘든 거라고요. 사실.”

그래서 지금도 그가 녹음한 당시의 자료와 논문이 정선아리랑 연구의 밑거름이 되고 있다. 학문은 이렇게 힘든데 ‘나는 어떻게 하고 있나?’ 노 교수의 40년 된 양옥집을 떠나며 잠시 반성했다.

유명희(춘천학연구소 학예연구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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