춘천보통학교 이전 뒤 현 시청 터 지칭…단양 출신 이범익에서 유래
주로 친일 관제 행사장으로 사용…해방 후에도 한동안 각종 행사 이어져

1923년 춘천 시가지 모습으로 《춘천교백년사》에 수록돼 있다. 봉의산 아래 ‘단양대’(현 춘천시청) 자리에 춘천공립보통학교가 있었다. 출처=춘천디지털기록관.
1923년 춘천 시가지 모습으로 《춘천교백년사》에 수록돼 있다. 봉의산 아래 ‘단양대’(현 춘천시청) 자리에 춘천공립보통학교가 있었다. 출처=춘천디지털기록관.

 

현 춘천초등학교의 전신은 1906년 9월 1일 ‘보통학교령’ 발포에 따라 9월 15일 수업을 개시한 춘천공립보통학교였고, 춘천공보의 전신은 대한제국 1년 전인 1896년 9월 17일 당시 춘천군 부내면 아동리(옛 옥천동)에서 강원관찰부공립소학교로 개교한 춘천소학교였다. 춘천소학교는 사가에서 시작해 1906년 9월 강원도청 내 1청사를 임시 교사로 삼았다가 1908년 10월에 현 춘천시청 자리에 교사를 신축하고 이전했다. 학교 위치에 대해 《춘천교백년사》에는 다음과 같이 서술돼 있다.

“춘천읍 번화가 본정1정목(중앙로1가) 청력상점淸力商店, 고도옥高島屋, 식산은행 등 네거리에서 동쪽 청력상점을 지나면 큰 대문이 있는 고래등 같이 큰 기와집이 있다. 이 집이 최양호 씨네 집인데 영월에서 살다 왔다 해서 영월집이라고 불렀다. 이 집 앞에 서면 언덕 높이 쳐다보인다. 20m가량 올라가면 시멘트 콘크리트 문주가 양쪽에 서 있다. 여기가 단양정(현 옥천동) 111번지 춘천공립보통학교 정문인 것이다.”

1923년 당시 춘천공립보통학교 교사. 《춘천교백년사》에 수록된 사진. 출처=춘천디지털기록관.
1923년 당시 춘천공립보통학교 교사. 《춘천교백년사》에 수록된 사진. 출처=춘천디지털기록관.

 

춘천공보는 현 춘천시청 자리에서 30년 내내 자리를 지키다 1937년 11월 28일 현 춘천초 자리(당시 본정3정목)에서 신축 교사 낙성식을 거행한 뒤 이전했다. 교사를 신축하는 데 들어간 총공사비는 10만1천590원이었다.

춘천공보가 이전한 뒤 현 시청 자리는 ‘단양대丹陽臺’란 이름으로 불리며 광장으로 쓰였다. 단양대란 이름은 1929년 11월 28일 부임해 1935년 4월 1일까지 5년 반 가까이 강원도지사를 역임한 이범익과 관련이 있다. 《춘천교백년사》에 따르면, “단양대는 일정 때 지사로서 선정을 베풀었다고 인정받고 있는 이범익 지사의 고향인 충북 단양군이라는 데서 지사 관사와 이웃하고 있어 붙여진 이름”이다.

강원도지사를 역임한 뒤 만주에서 간도특설대 창설을 주도한 이범익.
강원도지사를 역임한 뒤 만주에서 간도특설대 창설을 주도한 이범익.


1942년 7월 7일, 바로 이 단양대에서 ‘지나사변’ 5주년 기념식이 열렸다. 지나사변이란 당시 일제가 중일전쟁을 일컫는 말이었다. 《매일신보》는 1942년 7월 9일 “이날 춘천읍에서는 오전 10시부터 유생·지사를 비롯해 관민·학생, 각 애국반원 등 무려 3천여 명이 단양대에 모여 기념식을 성대히 거행”했다고 보도하면서 이날 참가자들은 국민의례, 조서봉독, 필승기원 묵도, 결의문 낭독, 황국신민서사 제송, 천황폐하만세 봉창 등을 진행한 뒤 각 단체별로 강원신사까지 시가행진을 벌여 신사를 참배했다고 전했다. 이처럼 단양대는 각종 기념식과 훈련 등 다양한 관제 행사장으로 쓰였는데, 해방 이후에도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 1947년 10월 19일에는 대동청년당 강원도단 결성식이 이곳에서 열렸고, 1950년 10월 4일 국군환영대회나 1956년 8월 30일 민주당 강원도당부 결성식도 이곳 단양대에서 개최됐다. 이후 단양대란 명칭은 신문기사에서 사라졌지만, 1984년 발간된 《춘주지》나 1996년 발간된 《춘천교백년사》 등에 관련 내용이 언급돼 있다. 앞서 인용했듯이 춘천초교 100년의 역사를 기록한 《춘천교백년사》는 단양대란 명칭의 유래를 설명하면서 대표적인 친일파였던 이범익을 버젓이 “지사로서 선정을 베풀었다고 인정받고 있는 이범익”이라고 기술했다.

단양대에서 열린 ‘지나사변’ 5주년 기념식. 《매일신보》 1942.07.07.
단양대에서 열린 ‘지나사변’ 5주년 기념식. 《매일신보》 1942.07.07.

 

1883년 충북 단양에서 출생한 이범익은 1912년 10월 춘천군수에 임명된 후 전국 각지의 군수를 역임하고 1929년 강원도지사로 승진했다. 일제의 식민통치에 적극적으로 협력한 공로를 인정받아 일본 정부로부터 각종 훈장을 받은 그는 1937년 8월 만주국 국무원 촉탁으로 파견돼 1940년 4월까지 만주국 간도성장間島省長을 지냈다. 그는 특히 “조선 독립군은 조선인이 다스려야 한다”면서 악명 높은 간도특설대 창설을 주도해 항일 독립군 토벌에 앞장섰다. 간도특설대는 독립군 탄압은 물론 민간인 학살과 약탈·고문·강간 등 악행을 일삼았다. 오죽하면 조선총독부는 그를 “조선인 관리 가운데 가장 활동적인 인물”이라고 평가했을까. 해방 이후 1949년 반민특위에 의해 체포됐지만, 기소유예 처분을 받은 이범익은 한국전쟁 중 납북돼 소식이 끊겼다.

소양로 비석군에 있는 이범익 영세불망비.
소양로 비석군에 있는 이범익 영세불망비.
2018년 8월 15일, 이범익 영세불망비 뒤에 설치한 이범익 단죄문.
2018년 8월 15일, 이범익 영세불망비 뒤에 설치한 이범익 단죄문.

 

지금도 소양로 비석군에는 이범익 도지사를 찬양하는 ‘이범익 영세불망비’가 있다. 2013년 춘천 시민사회를 중심으로 이범익 단죄문을 설치하자는 논의가 일어 그해 8월 15일 영세불망비 앞에 이범익 단죄문을 설치했다(《춘천사람들》 2021.03.04.).  

전흥우(발행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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