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쏘가리상’ 떠받치고 있는 삭도 지주 기초…소양2교 앞쪽에 8개
1940년 화천댐 건설자재 운반 목적으로 삭도索道 건설

소양2교 앞 호수 위에 서 있는 콘크리트 수중 구조물. 두 개는 쏘가리상을 받치고 있고, 그보다 더 멀리 호수 중심부에 또 두 개, 그리고 마장천이 의암호에 합류하는 지점에 네 개가 있어 모두 여덟 개가 서 있다. 마장천 하류에 있는 구조물은 최근 조성된 ‘마장달빛교’ 지지대로 사용되고 있다. 이것은 일제강점기에 화천댐 건설에 필요한 자재를 운반할 목적으로 1940년에 건설한 삭도(케이블카) 지주 기초 구조물이다. 그 자세한 내용을 1940년 4월 10일 발행된 《매일신보》 기사에서 확인할 수 있다. 기사를 쉽게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조선 제일을 자랑하는 한전삭도를 완성”. 《매일신보》, 1940.04.10.
“조선 제일을 자랑하는 한전삭도를 완성”. 《매일신보》, 1940.04.10.

 

“세기의 공사 한강수전漢江水電 공사에 물자를 수송하기 위해 춘천-화천 간 케이블을 가설하기로 해 1940년 15~16일경부터 삭도를 이용해 물자를 실어나르게 됐다. 삭도 공사는 ‘금안삭도부今安索道部’가 맡아 총공사비 10만 원으로 1939년 3월에 실측한 후 그해 6월부터 4구로 나누어 착공해 매일 200여 명의 노력을 들여 공사를 진행했다. 총 거리 29km 사이에 222개의 지주와 여섯 개의 철주를 세웠는데, 지주와 지주 사이가 제일 먼 곳은 600m나 된다. 수송 설비로는 춘천에 50마력, 신동리에 100마력, 석우리에 100마력과 75마력의 발동기를 장치해 수송 능력을 발휘하는데, 반기搬器 640개를 90m 간격으로 달아 쉴새 없이 실어나른다. 반기 한 개에는 250kg의 짐을 실을 수 있기에 한 시간에 25t, 하루에 200t을 실어나를 수 있는데, 매일 한 차례씩 왕복하는 데 여덟 시간이 소요된다. 함남 허천강수전에서 사용하는 삭도가 19km로 그동안 전 조선에서 제일이었는데, 이번 한강수전 삭도는 그보다 10km나 길어 조선에서 제일 긴 삭도로 자랑하게 되었다.”

1930년대 후반 조선총독부의 퇴임 관료들과 조선식산은행이 전시 물자인 특수강 생산에 필요한 전력을 확보하기 위해 한강수력전기주식회사를 설립하고 북한강에 화천댐을 건설하기 위해 그 자재를 운반할 목적으로 삭도를 설치한 것이다. 당시 화천댐 건설을 위한 자재 수송방법으로는 도로를 연장하는 것, 철도를 부설하는 것 등이 모색됐지만, 삭도 건설이 가장 경제적이라는 결론이 났다. 이에 따라 삭도를 가설하기 위해 229개의 지주와 6개의 철주를 세웠는데, 근화동(당시 전평리)에서 우두동(당시 마산리) 사이 1.1km의 소양강 구간에 지주를 떠받칠 시멘트 기초를 설치한 것이다.

당시 화천댐 공사에 필요한 물자를 조달하려면 운반에만 3년이 걸린다고 했다. 화천댐 건설사인 한강수전은 이를 위해 삭도를 가설하는 동시에 별도로 50대의 트럭을 준비했다. 삭도가 완공되기 전에는 트럭으로만 물자를 운반해야 하는데 이를 위해 춘천-화천 사이에 별도로 200여만 원을 들여 도로도 신설했다.

화천댐 자재운반 삭도.《신사우동》, 춘천문화원, 192쪽.
화천댐 자재운반 삭도.《신사우동》, 춘천문화원, 192쪽.

 

1939년 착공해 1944년에 완공된 화천댐은 콘크리트 중력식으로 건설된 발전용 댐이다. 높이가 81.5m고 제방 길이는 435m다. 총저수량은 10억1천800만t이며 유역면적은 3천901㎢, 만수위 때의 수면 면적은 38.2㎢다. 발전용량은 10만8천㎾다. 제1·2호 발전기는 1943년 5월에 준공돼 해방 이후 북한지역에 속했다가 한국전쟁 당시 파괴됐는데, 휴전 이후인 1957년에 제3호기, 1968년에 제4호기를 설치했다.

화천댐으로 인해 형성된 호수는 현재 ‘파로호’로 불리는데, 원래 이름은 ‘대붕호’였다. 화천댐 건설 이전에 이 지역은 수하리와 수상리였다. 이 마을에서는 대붕을 숭배했는데, 대붕이란 한 번 날개를 펴면 9만 리를 난다 해서 인근에 구만리라는 마을이 있다. 마을이 수몰 위기에 이르자 주민들은 댐 이름에 ‘대붕’을 넣어달라고 했다. 일제는 이를 수락한 것처럼 하고 실제로는 ‘붕鵬’과 비슷한 한자인 ‘명䳟’을 넣어 주민들을 속였다. 일제가 만든 ‘대명제大䳟堤’라는 표지석이 1986년 뒤늦게 발견되면서 알려졌다.

한국전쟁이 한창인 1951년 5월 24일부터 30일까지 이 부근에서 한국군과 미군은 중국군에 대한 대규모 공격을 벌여 2만4천141명을 사살하고 7천905명을 포로로 잡았다. 이 소식을 들은 이승만이 현장을 방문해 ‘오랑캐를 깨부쉈다’라는 의미로 ‘파로호破虜湖’라 명명했다.                       

삭도 지주 기초를 활용한 ‘쏘가리상’과 ‘마장달빛교’. 출처=춘천디지털기록관.
삭도 지주 기초를 활용한 ‘쏘가리상’과 ‘마장달빛교’. 출처=춘천디지털기록관.

 

전흥우(발행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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