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댁의 서면살이 30년 ③

마쓰다 유카리

첫아이를 낳은 1994년 8월은 기록적인 폭염이 기승을 부리던 해였다. 출산 전날 병원에서 정기검진을 받았을 때는 이상 없이 괜찮다고 했는데, 다음 날 아침부터 허리가 끊어질 듯 아프기 시작했다. 결혼 전에 신장결석으로 앓은 적이 있었는데 그때와 비슷한 통증이어서 걱정이 되었던 나는 남편에게 결석 때문에 아픈 것 같으니 병원에 가야겠다고 했다.

병원에 도착하니 임산부임을 알고 진통이 아니냐고 물었지만, 첫 임신이라 몰랐던 나는 과거에 결석을 앓은 적 있는데 그 통증이랑 같아서 가지고 있던 진통제를 먹었다고 말했다. 간호사는 산도가 열리기 시작했는데 무슨 소리를 하냐면서 웃었다.

아침 7시에 응급실에 갔는데 아기를 낳고 나니 저녁 5시 30분이 넘었다. 남편은 소에게 여물을 줘야 해서 집에 가고 대신 형님이 왔다. 그러나 대학병원이었기에 진통하는 동안 혼자 침대에 있어야 했다. 다른 사람들은 엄마가 곁을 지켜주겠지만, 나는 그럴 수 없었기에 정말 불안했다. ‘나도 엄마가 옆에 있으면 얼마나 좋을까’라는 생각에 엄마가 몹시 그리웠다. ‘나를 이렇게 힘들게 낳아주셨구나’ 하는 마음도 들었다. 그때처럼 엄마가 생각난 적이 없는 것 같다.

다만 한국에 올 때 인사도 없이 편지 한 장만 남기고 왔기에 엄마에게 미안한 마음뿐이라 하염없이 눈물만 흘렸다. 머리까지 이불을 뒤집어쓰고 울고 있던 내게 간호사가 왜 우냐고 물었지만,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장시간의 진통 끝에 아이를 낳고 2박 3일 동안 입원해 있었다. 병실은 냉방이 되지 않아 몸이 너무 몸이 뜨겁고 더워서 시원한 음료수나 아이스크림이 먹고 싶었다. 남편에게 시원한 음료를 사다 달라고 부탁했지만, 돌아온 남편의 손에는 미지근한 음료수가 있었다. “시원한 것 사 오라고 했잖아!”라고 화를 내자 남편은 그저 없어서 그랬다고 대답했다. 내가 원하는 것 하나 못 사주나 하는 마음에 원망하는 마음도 들었다. 뒤늦게 알고 보니 같은 병실에 있던 아주머니가 남편을 뒤따라가 절대 차가운 음료를 마시면 안 된다고 알려주었다고 했다.

퇴원한 날은 기록적 폭염이 있던 해였던 만큼 몹시 더운 날이었다. 배를 타고 집으로 돌아올 수 없어 택시를 타고 돌아왔다. 50~60대 정도로 보이는 택시기사는 그렇게 더운 날임에도 불구하고 내가 산모라는 걸 알고 창문을 꼭 닫고 운전했다. 땀이 줄줄 나고 숨이 막히는 더위에 기사에게 미안한 마음이 들어 그냥 창문을 열어달라고 부탁했다. 하지만 그 기사는 땀을 흘리면서도 산모는 바람을 맞으면 안 된다면서 집까지 오는 내내 창문을 닫고 운전했다. 당시엔 신매대교가 없어서 의암댐을 돌아 약 1시간 정도 걸리는 거리였는데도 불구하고 그 긴 시간을 그렇게 나를 배려했다.

일본에 있을 때는 출산 후에 찬 것을 먹으면 안 된다든지, 바람을 쐬면 안 된다는 것을 알지 못했기 때문에 병원에서 만난 아주머니와 택시기사의 도움이 너무나도 고마웠다. 돌이켜 보면 하나하나 쌓아 올린 한국인의 정 덕분에 지금의 내가 있다는 것을 깨닫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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