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29년 춘천빙상경기 우승자들. 오른쪽부터 1만m 2등 조인구, 1등 김경봉. 학생 1만m 1등 정봉교, 2등 최승학, 3등 이병숙. 《조선일보》, 1929.02.02.
1929년 춘천빙상경기 우승자들. 오른쪽부터 1만m 2등 조인구, 1등 김경봉. 학생 1만m 1등 정봉교, 2등 최승학, 3등 이병숙. 《조선일보》, 1929.02.02.

 

1929년 1월 1일 발행된 《동아일보》에 재미있는 글이 있다. 일제강점기 실업가로 이름난 현동수라는 사람이 쓴 글인데, 쉽게 풀어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신년호를 마치고 나니 때가 마침 겨울이라 빙상경기에 대한 한마디 삽화를 소개해 보련다. 지금은 스케이트라면 얼음 지치는 것으로 알지만 그때만 해도 호랑이 담배 먹던 옛날 25년 전 일이다. 이때에는 스케이트가 무엇인지 얼음 지치는 것이 무엇인지 모르던 을사년이다. 그 당시 미국으로 돌아가는 선교사 질레트 씨의 가구를 경매할 때 거저 준대도 무엇에 쓰는 물건인지 몰라서 아무도 사는 사람이 없는 철제 물건이 있으니 하도 기이하게 여겨 지금 인천에 있는 현동순 씨기 일금 15전에 이것을 샀다. 사기는 샀으나 이것이 무엇을 하는 것인지 몰라 그 후 질레트 선교사를 찾아갔으니 그제야 비로소 얼음 지치는 스케이트라는 걸 알게 되었다. 현 씨는 당시 주택 부근인 삼청동 개천에서 몇 번 지쳐보았으나 나가지를 않아 고심한 끝에 결국에는 성공했다는 에피소드가 있으니 이것이 조선에 스케이트를 신에 대고 얼음을 지친 시초였다. 그리고 그 스케이트를 지금까지 보관하고 있는데 지금 이것을 사려면 25원 이상이나 든다고 한다. 이 얼마나 기이한 이야깃거리인가?

요컨대 1904년 을사년에 미국인 선교사 질레트가 스케이트를 경매로 내놨는데 무엇에 쓰는 물건인지 아무도 몰랐다는 것이다. 인천에 사는 현동순이란 사람이 신기한 물건이라 무턱대고 15전을 주고 샀다가 나중에 스케이트라는 것을 알고 삼천동 개천에서 열심히 노력한 끝에 조선에서 스케이트를 처음 탄 사람이 됐다는 것인데, 그로부터 25년이 흐른 1929년 무렵 스케이트 가격은 160배도 넘는 25원이었다는 것이다.

스케이트 관련 기사는 1920년대 중반 이후에서 많이 등장하기 시작한다. 이 무렵부터 비로소 스케이팅이 겨울 스포츠로 자리를 잡기 시작했다고 볼 수 있는데, 물론 당시 스케이팅을 즐길 수 있는 계층은 극소수에 지나지 않았을 것이다. 1934년 12월 11일에 발행된 《조선일보》에 윤태순이 스케이트를 주제로 쓴 동시가 있다.

집 뒤 방축물이 얼었다

우리 나가 놀자

너는 팽이를 돌려라

너는 어름을 지처라

너하고 나하구는 서로 끌기 하자

믹그러저 골탕 먹는 애는 바-보

야- 우리 언니 스케이트 탄다

구경가자

《조선일보》, 1934.12.11.
《조선일보》, 1934.12.11.

 

이런 과정을 거쳐 1920년대 후반에 이르러 전국적인 빙상경기가 속속 개최되기 시작했다. 1929년 1월 27일, 춘천에서 춘천빙상경기대회가 처음 열렸다. 강원도체육협회가 주최하고 조선일보 춘천지국이 후원하는 스피드 스케이팅 경기였다. 이날 일반부에서 1만m를 23분 39초에 주파하는 좋은 기록이 나왔다. 일반부 1만m 1등은 김경봉, 2등은 조인구였고, 학생부 1만m 1등 정봉교, 2등 최승학, 3등 이병숙이었다.

1933년 1월 20일에는 춘천군체육협회 주관으로 제1회 빙상경기대회가 개최됐다(매일신보 1933.02.01.). 이후 거의 매년 1월 말에서 2월 초에 춘천에서 빙상경기가 열렸다.

“…높이 나부끼는 일장기 하에 경기장은 활기 있는 선수의 경기와 다수 관람자의 감격 또는 웃음으로 대성황을 이루어 춘천 체육계의 기록을 빛나게 할 뿐 아니라 비상시국에 공헌함이 많은 중 오후 3시경 폐회하였다 … 최후 영예의 우승컵은 춘천금융조합팀을 대항으로 이 영예의 월계관을 획득한 빙상 맹장으로 말하면 김춘희·김규범·김영식·이병소 제군으로…”

한때 춘천사람들은 ‘스케이트 잘 타는 사람들’로 통했다. 그도 그럴 것이 춘천은 걸어서 10분이면 어디에서나 얼음을 지칠 수 있었다. 곳곳이 천연 아이스 링크여서 한강 다음으로 전국 규모의 빙상경기대회가 많이 열렸다고 한다. 빙질로 따지면 전국 최고를 자랑했다. 기온에 따라 소양강 일대 빙질이 좋지 않으면 아침못이나 지내못 등 저수지에서 경기를 개최하기도 했다. 일제강점기부터 의암댐이 건설되는 1960년대까지는 소양1교 위쪽 소양강 링크가 유명했다. 의암댐 건설 이후에는 공지천 링크로 빙상의 주 무대가 옮겨졌다. 

그러나 일제강점기에 스케이트는 일본인 아이들이나 기와집골에 살던 일부 부잣집 아이들의 전유물이었다. 국산 스케이트가 보급돼 대중화되기 시작한 건 1950년대 후반에 이르러서였다. 스케이트가 대중화되면서 춘천사람들에게 스케이트는 일상이나 마찬가지였다. 당연히 전국 빙상경기대회에서 늘 좋은 성적을 기록한 최고의 선수를 보유할 수 있었다. 1958년 춘천교대부속초등학교 빙상부가 창설돼 1960년 전국빙상대회에서 백곰기와 연맹회장기 등 모든 대회에서 우승을 거머쥐었다. 이후 중앙초·춘천초 등 춘천의 거의 모든 초등학교에 빙상부가 생겼고, 1973년에는 유봉여중과 유봉여고에도 빙상부가 창단됐다.

춘천 출신으로 대한민국을 대표하는 스케이트 선수로는 이규혁 선수의 아버지인 이익환 씨가 있다. 그는 1968년 제10회 프랑스 그르노블 동계올림픽에 출전한 8명의 선수 중 한 명이었는데, 스피드 스케이팅 선수로는 유일했다. 그는 1970년 핀란드 로바니에미에서 열린 동계유니버시아드대회 남자 1천500m에서 7위를 차지하기도 했다. 여자 선수로는 1972년 뉴욕주 레이크플래시드유니버시아드 대회에서 여자 1천m에서 우승한 전선옥이 유명했고, 그 뒤를 이어 유봉여고 권복희도 1974년 전일본선수권대회 1천m에서 우승했다.                        

“소양강 은반 위에 빙상경기 성황.” 《동아일보》, 1939.02.16.
“소양강 은반 위에 빙상경기 성황.” 《동아일보》, 1939.02.16.

 

전흥우(발행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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