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유산으로 소풍가자 ①

 

어렸을 때 무덤과 죽음이라는 의미는 내게 큰 두려움이었다. 아버지가 고향을 떠나 강원도 전방에 자리하시면서 흔한 대가족 형태에서 겪는 생로병사를 경험하지 못한 데서 오는 낯섦도 한몫했던 것 같다. 나이를 먹고 누구나 피할 수 없는 삶과 죽음에 대해 생각하면서 무덤은 더이상 낯선 공간이 아니었다. 그의 삶을 위로하고 내 삶을 위로받는 치유의 공간이기도 했다. 이제 산속에서 주인 없는 무덤을 만날 때는 들꽃 한 다발 꺾어 올리며 ‘그대 힘들었나요? 지금은 편안하신가요?’ 자연스럽게 말 한마디 건네고 빈 무덤에 앉아있다 오곤 한다.

 

몇 년 전, 청명한 가을날 처음 조만영 묘역을 안내받았다. 조선왕조의 권문세가로 사극에서 주로 봐왔던 조만영이 신북면 지내리 깊은 골짜기에 이렇게 가깝게 묻혀있다는 게 참 경이로웠다. 더구나 임금의 어필을 하사받은 어필각이 있다는 사실 또한 그랬다. 

올 초 문득 문화유적으로 소풍을 떠나고자 했을 때 처음 조만영 묘역을 떠올렸다. 그동안 일요일 아침마다 ‘지내리 429-1’ 카페에서 했던 기공체조를 하고, 카페에서 출발해 근처 문화유적으로 가벼운 소풍을 떠날 계획을 세운 것이다.

문화유적 답사가 문화유적을 공부해야 한다는 마음으로 출발한다면 문화유적으로 가는 소풍은 함께 그 공간에서 호흡하고 오래 머물면서 그 공간을 충분히 향유하자는 데 목적이 있다. 그래서 과거의 흔적들이 지금과 자연스럽게 어울리는 익숙한 공간이 되기를 바라는 마음에서다. 소풍 친구들을 구하는 일은 어려움이 없었다. 기공체조를 하고 첫 소풍을 함께 한 체조 도반들이 기꺼이 일 년 소풍을 함께 하기로 했기 때문이다.

1월 13일 오전, 카페에서 한 시간 족히 체조를 끝내고 텀블러에 커피를 담고 몇몇 도반들과 길을 떠났다. 카페에서 조만영 묘역까지의 길은 카페에서 걸어 불과 10분 이내였다. 제법 쌀쌀한 1월이었지만 논둑길을 따라 묘역까지 걸어가는 소풍 길에 모두가 신나있었다.

조만영趙萬永은 조선 후기 추존왕 익종의 장인이며, 풍양조씨 세도의 기초를 마련한 인물이다. 그의 딸이 효명세자의 빈으로 책봉되어 1827년 효명세자가 대리청정하게 되자 세력을 키우고 풍양조씨 세도의 기초를 마련했다. 

풍양조씨는 외척이 된 이래 안동김씨의 독단적인 권력 농단을 견제할 수 있었다. 그러나 대리청정하던 효명세자의 죽음으로 큰 좌절을 맛봐야 했다. 뒤에  신정왕후(1808~1890)로 책봉된 그의 딸은 요절한 남편과 달리 82세까지 장수하면서 흥선군의 둘째 아들인 고종에게 왕위를 승계시키고(1863년 12월 8일) 3년 동안 수렴청정을 시행하는 등 뚜렷한 정치적 발자취를 남겼다.

그렇다면 조선 후기의 권문세가 조만영의 묘역이 춘천 신북읍 지내리에 위치하게 된 이유는 무엇일까? 춘천 애막골 한쪽으로 아파트 사이 구릉에 오래된 묘역이 자리하고 있는데 고성이씨와 풍양조씨 모자의 무덤이다. 무덤의 주인공인 고성이씨와 풍양조씨 조안평은 여말선초에 활동한 인물이다. 

“고성이씨는 행촌杏村 이암李嵒의 딸로서 풍양조씨인 조신趙愼에게 출가하여 조안평趙安平과 조개평趙開平 두 아들을 두었다. 아버지인 이암은 고려말 홍건적이 침입하자 공민왕을 안동까지 호종하기도 한 관료로, 동국의 조맹부라 불릴 정도로 글씨에 뛰어난 인물이었다. 남편인 조신의 둘째 형이 고려말 전횡을 일삼던 신돈을 제거하기 위한 거사를 도모하다 사전에 탄로돼 죽임을 당하고 집안은 멸문지화를 당할 위기에 처하게 된다. 이때 조신은 차남인 개평을 데리고 충남 부여로, 부인인 고성이씨는 장남인 안평을 데리고 춘천으로 피신하였다고 한다.

조안평의 직계 후손들 가운데는 일본에 사신으로 갔다가 고구마 종자를 가져와 널리 보급한 것으로 유명한 조엄趙曮과 19세기 안동김씨와 세도정치의 한 축을 담당했던 조만영·조인영趙寅永 형제 등이 있다. 영조 임금 때 우의정을 역임한 조재호趙載浩의 집이 소양로에 있었다는 기록도 보이고 조만영·조인영 형제의 무덤이 모두 춘천에 조성된 점 등으로 볼 때, 춘천은 풍양조씨 가문의 대표적인 세거지라 할 수 있다.”

- 춘천사람들(www.chunsa.kr, 2020.07.27.)

조만영 묘역이 춘천에 있게 된 궁금증이 풀리는 지점이다.

 

한문학자인 한희민 박사의 설명을 들으며 묘역의 주인공이 명문 세도가로 기세등등했던 조선 시대로 시공을 초월하여 상상의 나래가 펼쳐진다. 하지만 그런 그도 1845년 궤장几杖을 하사받고 영돈령부사가 되는 영예를 누렸지만, 문중 내의 내분과 아들 병귀秉龜가 갑자기 죽자 실의에 빠진 후 눈이 멀어 병사하였다고 한다. 그 권력의 무상함이라니!

‘그곳에서 편안하신가요? 그곳에서 보는 세상은 어떤가요?’ 겨울이라 더 시리도록 파란 하늘을 보면서 혼잣말을 되뇌어 본다.

멀리 무덤 위에서 내려다보는 동네의 겨울 풍경은 세상사에 관심 없는 듯 평화롭기만 하다. 우리의 목적은 소풍 아니던가? 카페에서 텀블러에 담아 온 커피가 식어가고 있다. 묘역 위에서 산길을 들어선다. 카페에서 논길을 지나 묘역에서 다시 카페까지 돌아오는 산길은 산책로로 손색이 없다. 

겨우내 쌓여 있는 온갖 참나무 낙엽들, 추위에도 여전히 푸르른 소나무들. 소나무 숲의 청량한 겨울 공기, 그 사이로 보이는 새파란 하늘. 잠시 앉아 커피를 마시고 쿠키를 나누는 이 시간이 바로 우리가 길을 나선 가장 큰 목적이다. 권력의 무상함을 잠시 잊고, 삶의 고단함도 내려놓고, 욕심도 비우고…. 이 시간과 이 공기, 그리고 이 느낌을 즐기는 것이다.

 

원미경 시민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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