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복궁이 중건된 지 환갑이 되는 1927년, 차상찬은 억만 세월 수도의 정궁으로 남아 있기를 기원한 대원군의 헛된 꿈을 비판하며 망국의 아픔을 얘기하고 있다. 지금도 끊임없이 건물을 지어대는 탐욕을 경계하며 함께 경복궁 이야기를 들어보자. 1927년 1월 1일 발간된 《별건곤》 제3호에 “200만 명의 일꾼들, 팔백만 원의 국민재산, 회갑을 맞는 경복궁, 백성들의 원성을 산 대궐과 대원군 이야기”라는 제목으로 실린 글이다.

지금까지 전해지는 옛날 노래

“삼각산 제일봉에 봉학이 넌즈시 앉았구나. 봉의 등에 터를 닦고 학의 날개에 집을 지으니 동구재·만리재는 청룡이요, 왕십리 낙산은 백호로다. 물의 조상 한강수는 깃과 띠처럼 둘러쳐져 요충지를 이루고 산의 명산 관악산은 전망이 좋을 시고, 종남산은 앞을 지키고, 북악산은 뒤를 지키는지라. 인왕산은 오른쪽 날개가 되고 맹감사 고개는 왼쪽 날개가 되어 장안의 만호 억만 명을 굽어 살펴보니 천하의 금성탕지에 비할 바 아니고 억만 세월의 수도로다.”

이 노래도 어느덧 벌써 옛날 가락이 되어 서울과 같은 도회지에서는 별로 들어 볼 수가 없고 다만 시골 벽촌에 아직도 남아 있어서 촌 노인이나 아이들의 여흥 거리가 되고 말았다. 이 노래는 당시 대원군이 경복궁을 중건할 때에 공사에 복역하는 일반 관리와 일꾼들을 위로하고 사기를 진작하기 위하여 영웅적 기풍으로 전국의 노래하는 기생이나 춤추는 무동들을 크게 모집하여 삼삼오오로 모듬을 편성하고 공사장에 들어가 이 노래를 부르게 한 것이다. 이것은 지금 우리 민간에서 가옥을 건축하려고 터를 닦을 때 발을 맞추고 괴로움을 잊기 위하여 장고나 북을 치며 “잉여라- 차” 하고 가지각색의 소리를 받고 받아 채기도 하는 것과 마찬가지이다. 고역에 피땀을 흘리며 속으로 ‘아이고 나 죽겠소. 대원 대감 나 살리시오’ 하든 백만의 일꾼들도 이 노래 한번 들으면 전후의 고뇌와 저주와 원망을 다 잊어버리고 순한 양의 무리 모양으로 그저 복역만 한 것을 보면 이 노래가 얼마나 민중에게 위안을 주었는지 알 수 없고, 또 대원군의 수단도 역시 기묘한 수단이라 아니할 수 없다. 대원군은 그러한 수단을 써서 일꾼만 위로할 뿐만 아니라 모든 사람에게 골고루 베푸는 동시에 노래하는 기생과 춤추는 무동 또한 독려하고 위안을 하기 위하여 관작까지 주었으니 궁중의 예인이 위계를 가지게 되었다. 심지어 아리따운 궁중 예기까지 주먹 같은 옥관자를 복색 좋은 수탉 벼슬 모양으로 딱딱 부치고 아장아장 걸어 다니게 된 것도 이때부터 된 것이었다.

조선 태조 4년에 창건된 경복궁

경복궁이 창건되기는 지금으로부터 542년 전 바로 이씨 태조 고황제 4년 을해 9월이었다. 처음에 이태조는 고려의 왕위를 빼앗고 공주 계룡산으로 천도하려고 지금 소위 신도라 하는 곳에다 궁궐을 짓다가 교통의 불편과 땅의 생김새의 불리함을 깨닫고 공사를 중지한 후 다시 명승 무학의 지시를 받아들여 한양에 자리를 잡고 새로 궁궐을 건축하여 정도전으로 하여금 경복이라 이름을 짓게 하였으니 이것은 곧 시경에 “군자만년에 개이경복(군자만년토록 한량없는 복을 크게 받으리로다)”이라는 의미를 취한 것이었다. 그 뒤 약 200년을 지나 선조 25년(1592년) 임진에 이르러서는 우리 조선사람으로서 잊으려야 잊을 수 없는 임진왜란이 일어나서 조선의 남쪽 일대가 먼저 적군의 무자비한 칼날에 유린되었다. 신립 장군이 탄금대에서 패배함에 수도가 일시 위급하여 임금이 탄 가마가 의주로 도망하였다. 무뢰한 각 관청의 노예와 성난 백성들이 국가 재산을 약탈하고 자기가 저지른 죄의 증거를 인멸하고, 노비명부를 인멸하기 위하여 무엄하게도 궁중에 몰려들어 각 곳에 불을 질렀다. 그 크고 웅대하기가 천하제일이라던 궁궐이 하루아침에 아무것도 남지 않게 되었다. 진나라 아방궁의 옛 자취를 밟은 듯 무너진 주춧돌만 남은 빈터에 까마귀와 까치의 무리만 슬피 울어 여러 사람의 슬픔을 자아낼 뿐이었다.

라태랑(차상찬읽기시민모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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