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유산으로 소풍가자 ②

아침부터 대지의 기운이 수상하다. 기공체조를 하러 지내리로 가는 길, 우두동 버드나무 숲엔 가지 끝마다 스멀스멀 소문도 없이 연둣빛 생명이 꿈틀거리고, 바람은 먼 곳의 훈풍을 실어 나른다. 입춘이다.

기공체조를 끝내고 ‘지내리 429-1’ 카페에 입춘첩을 붙이는 주인과 객들의 마음속에 이미 봄기운이 완연하다. 한문학자인 한희민 선생님의 입춘첩은 뛰어난 예술적 상상력으로 봄의 기운과 행운을 불러모아 주었다. 모든 마음이 한 곳으로 향하던 이 따뜻한 기원, 오늘을 기억하리.

"병인년(1686) 여름 나는 부사의 직임을 사직하였다. 문소각 가운데에 누우니 바람과 해가 청화하였다. 남은 꽃을 쓸쓸히 바라보다 문득 산수의 그리움이 일어나 막객을 이끌고 고란산에 올라 출옹(朮翁)이 예전에 살던 집을 방문하였다. 이어 나송산으로 들어가 용연(龍淵)에 앉아 물고기를 구경하였다. 양통 고개를 넘으면서 맥왕의 옛 도읍지를 애도하고 비스듬히 용화산으로 들어갔으니, 골짜기 입구의 수석이 매우 훌륭하였다."

입춘첩을 붙이고 1684년부터 2년간 춘천부사로 재임했던 송광연이 물고기를 바라보던 용연龍淵으로 두 번째 소풍을 떠났다. 그의 기록에는 이제 떠나야 하는 춘천을 향한 애틋한 마음과 춘천에 은거하였던 선인들을 흠모하는 겸양의 마음, 두 마음이 공존하는 듯했다. 송광연은 마지막 여행길에 삼한동을 방문하고 《삼한동기》라는 소중한 기록을 남겼다. 《삼한동기》는 삼한동을 직접 답사하고 그 주변의 지명과 유적, 그리고 자연경관을 청평동과 비교하여 서술한 유람기다. 그의 노정에는 고탄古呑(지금의 고탄리와 고성리), 그리고 삼한골이 있다. 송광연은 이 골짜기에 삼한시대의 절터가 있다는 연유에 따라 삼한동이라 한 것 같다. 이 일대를 통칭해 삼한동이라 하였던 것 같다.

삼한동으로 가는 어귀에 있는 용연은 수심은 꽤 깊고 바위가 위용 있게 자리하고 있다. 송광연이 여행길에 잠시 다리를 쉰 곳이다. 용연, 용이 살았을까? 고성리 길을 따라 자리한 사평천에 자리한 용연의 개울 바닥은 세월을 따라 약간 오염되었지만, 아직도 바닥이 훤히 들여다보여서 송광연이 바라보던 물고기의 후손이라도 만날 것만 같았다.

이곳에 자리를 펴고, 설 명절 전이라 주섬주섬 담아온 설음식을 펼치고 텀블러에 담아 온 ‘지내리 429-1’ 커피를 따르니 브런치 맛집 부럽지 않다. 지나간 세월의 흔적이 이 물길에서, 이 바위에서 시간과 공간 속을 헤집고 무심히 지나가는 게 보인다. 옛사람이 옛사람이 아니고, 지금의 나 또한 내가 아니다.

사평천 용연 옆으로는 ‘이와림’이라는 히노끼탕을 체험할 수 있는 일본식 스테이가 자리하고 있다. 다양한 이국의 문화를 체험하고자 하는 요즘의 여행 패턴이 골 깊은 이곳에 사람의 발길을 잇게 만드나 보다. 다양한 블로그를 통한 리뷰도 나쁘지 않다. 춘천부사 송광연이 보았다면 무슨 말을 했을까? 세월의 변화가 무상하다 생각하며 ‘나도 한번?’ 눈도장을 찍어 놓았다.

“이곳 일대에는 조선 광해군이 집권하던 시기에 벼슬을 버리고 청빈한 삶을 살던 출옹 이주가 은거하면서 춘천을 찾은 많은 문인들과 교류하였고, 동시대에는 졸옹 최인원 등도 살았어요. 이분들이 춘천댐 부근 문암서원을 건립하기도 했지요. 지옹 안숭양, 설서관직을 지낸 이천추 등이 고탄에 은거한 분들이지요. 이자헌 등이 머물던 청평산이 종교적인 은거지였다면, 고탄 일대는 성리학자들의 은거지였지요. 지리적으로 서울과는 너무 먼 거리도 아니면서 춘천부에서도 거리를 두고 있는 이곳이 성리학자들이 은거하기 좋았나 봅니다. 아마도 김시습이나 정약용 등이 발길이 닿았던 사창리나 청평산을 들어가는 길목에 자리해 그들의 청빈한 삶을 동경하던 사람들이 머물지 않았을까요?”

한문학자로 춘천지역 문인연구에 전념하는 한희민 박사의 설명을 듣다 보니 지금은 춘천지역 변방에 자리해, 춘천의 중심에서 밀려난 듯 보이는 이곳에 은거지로서 신비한 이미지가 중첩되며 산세도 개울도 달라 보인다. 풍경에 어쩔 수 없이 심상이 더해지면서 그 나름의 의미를 찾게 되나 보다.

 

이왕 이곳을 온 김에 주변 도요지를 돌아보기로 했다. 지역사를 꾸준히 연구해 온 오동철 선생도 동행하여 주변의 가치를 설명해 주었다. 《삼한동기》에 기록된 송광연의 여행길을 고증하는 두 분의 약간의 견해 차이조차도 우리에겐 신선했고, 문헌기록으로만 의존할 수밖에 없는 지역사의 한계를 직접 발로 뛰며 증명해가는 두 분의 열정은 늘 존경스럽기만 하다.

고성리에 도요지가 많은 이유는 춘천과 화천의 길목이라는 점, 물과 나무, 모래 등 재료의 공급이 원활하다는 점이라고 한다. 가마에 불을 때기에는 온도가 높은 소나무가 적합한데 소나무 산지라서는 아닐까? 도요지는 상당부분 훼손되었다지만 도자기 편들이 아직도 상당히 넓게 분포해 있어 놀라웠다.

하지만 도공과 마을의 흔적은 어디에서 맥이 끊겼을까? 도자기 편만이 옛 영화를 기억해주는 이곳에 아직도 원형에 가깝게 유지된 가마터도 있다니 과거와 지금을 잇는 연구와 보존도 필요해 보인다.

춘천의 변방, 지금은 한적하게 느껴지는 시골 마을. 출옹 이주가 살고 춘천부사의 마지막 여행길에 들러보던 곳, 성리학자들이 은둔했던 곳이라면 살기 좋은 곳 아니겠는가? 입춘의 따뜻한 기운이 골짜기마다 서려 봄 아지랑이라도 피어오를 것 같은 오늘도 고탄은 여전히 아름답다.

원미경 시민기자

 

원미경 시민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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