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풍지대’였던 춘천에서 1919년 11월 27일 거사 준비하다 실패
그해 12월 체포돼 1921년 5월 석방…1938년 전향한 뒤 친일

서대문형무소 투옥 당시의 김조길 전도사. 출처=한국사데이터베이스 일제감시대상인물카드.
서대문형무소 투옥 당시의 김조길 전도사. 출처=한국사데이터베이스 일제감시대상인물카드.

 

3·1혁명 당시 강원도에서는 3월 3일부터 4월 21일까지 한 달 넘게 많게는 수천 명에서 적게는 수십 명까지 크고 작은 만세시위가 있었다. 시작은 철원이었다. 3월 10일부터 12일까지 3일 동안 철원과 김화에서 500~800여 명이 시위를 벌였고, 3월 28일 화천과 인제에서 각각 2천여 명과 1천여 명의 만세시위가 있었다. 4월 들어 홍천에서는 1일에 읍내에서 천도교인 중심으로 200여 명이 시위를 벌인 데 이어 2일에는 800여 명이 동면사무소를 습격했다. 3일에도 400여 명이 시위를 벌였다. 횡성에서도 4월 1일 1천여 명, 2일 500여 명 등 연속 시위가 있었고, 4일에는 양양에서 예수교인 중심으로 600여 명이 밤늦게까지 시위했다. 양양 시위는 5일 300명, 6일에는 1천200여 명으로 불었다. 강릉에서는 4월 7일에 2천여 명이 시위했고, 같은 날 철원 천도교인 700여 명이 내서면사무소로 진입하며 시위를 벌였다. 원주에서는 4월 9일 곳곳에서 연인원 400여 명이 만세를 외쳤다. 이밖에도 비록 소규모이기는 하지만, 통천·평창·정선·이천·회양·울진·영월·삼척·회양 등 거의 전 지역에서 시위가 있었다.

그러나 유독 춘천에서만 주목할 만한 만세시위가 없었다. 3월 초부터 천도교인들 중심으로 만세시위를 준비했지만, 거사 전에 발각돼 체포되기 일쑤였고 3월 7일 춘천농업학교 학생들의 만세시위도 교문 밖으로 진출하는 데는 실패했다. 3월 28일 장날을 기회로 윤도순·이준용· 박순교·허기준 등 천도교인들 장터에서 만세를 불렀으나 겨우 십수 명이 호응하는 정도에 그쳤다. 그래서 춘천은 ‘3·1혁명의 무풍지대’였다는 말까지 나왔다. 그 까닭은 무엇일까.

3·1혁명 당시 춘천에서는 이렇다 할 만세시위가 없었던 배경과 관련해 먼저 언급할 수 있는 건 춘천에 도청 소재지로서 도청을 비롯해 군청에 이르기까지 관공서가 많았고 군대·경찰 등의 감시와 통제가 다른 지역보다 상대적으로 더 심했던 점을 들 수 있겠다. 다음으로 1914년 경원선 개통으로 철원 등 북강원도 지역은 교통이 발달하고 정보가 빨랐던 반면, 춘천은 1939년에서야 경춘선이 개통될 정도로 교통의 발달이 더뎠다. 마지막으로 시위 주도층은 주로 천도교·예수교 등 종교세력과 학생 등이었는데, 이들의 성향도 중요한 배경 중 하나였을 것이다.

춘천의 기독교는 보수적인 남감리회였다. 춘천지방 장로사인 스톡스는 특히 보수적인 인물이었다. 그는 3·1혁명에 대해 “소요사건”이나 “국법을 어기고” 등의 표현을 동원할 정도였다. 그러나 저항의식이 전혀 없었던 건 아니었다. 1918년 춘천에서 조선인으로는 처음으로 목사로 부임한 유한익 목사는 3·1혁명 이듬해에 불거진 ‘철원애국단사건’에 연루돼 체포될 정도로 항일의식의 소유자였다. 그리고 기독교인 중 대표적으로 또 한 명을 언급할 수 있는데, 춘천 기독교에서 상당히 중심적인 인물이라고 할 수 있는 바로 김조길이었다.

3·1혁명의 불길이 잦아든 이후인 4월 30일 남감리회 선교사 테일러의 어학교사인 이흥범과 세브란스의학전문학교 학생 이병천은 춘천 읍내에 한성임시정부의 ‘국민대회 취지서’ 배포하다 검거됐다. 이로부터 약 2개월 뒤인 6월 26일 춘천에서 ‘본처전도사’로 활동하던 김조길(당시 39세)은 또 다른 세브란스의학전문학교 학생 송춘근과 관계를 맺은 뒤 8월 16일 송춘근으로부터 전달받은 ‘국민신문’·‘독립신문’ 등을 예수교 신자와 여러 유력자에게 배포하는 한편, 남기리교 해외선교부의 롤링스 선교사가 춘천을 방문하기로 한 그해 11월 27일을 기해 유인물을 배포하고 만세시위를 벌이려다 일경에 적발돼 옥고를 치렀다.

경찰은 탐지로 11월 27일 거사에 실패한 김조길은 선언문을 지참하고 있다가 12월 21일 불심검문에 걸려 경찰서로 연행됐다. 그의 집에서는 박은식 외 29명이 서명한 선언서 등사본 95매, 고종의 아들 이강 외 33명이 서명한 선언서 등사본 124매, 대한민국 임시정부 성립을 축하하는 노래 103매, 독립운동 노래 76매 등이 발견됐다. 이 사건으로 송춘근과 춘천면장 출신의 이동화, 그리고 춘천의 기독교인 지달원·김민수·홍종숙·엄중환·김광호 등 8명이 체포됐다. 지달원은 정명여학교 교사로서 미국인 선교사 어학교사였고, 김광호 또한 미국인 선교사 어학교사였다. 홍종숙은 남감리교 목사였으며, 김민수와 엄중환은 평신도였다. 김조길은 18개월의 옥살이를 마치고 1921년 5월 20일 출옥했다.

3·1혁명 직후부터 검거되기 전까지 대한민국 임시정부 청년외교단 일원인 이일선, 대동단 일원 한기동 등과도 접촉했던 김조길은 옥살이를 마치고 나온 이후로는 사업과 선교에만 집중했다. 옥고를 치르면서 심경의 변화가 있었는지는 모르겠지만, 출옥한 뒤 일경의 삼엄한 감시의 눈초리 때문에라도 다른 데 눈을 돌릴 수 없었을 것이다. 그는 춘천교회에서 운영하는 춘천유치원과 정명여학당 등의 이사로 활동하는 등 사회사업에 열성으로 참여했다.

국내 민족주의자들은 중일전쟁 이후 대부분 일제의 탄압에 굴복해 전향했다. 기독교를 대표해 3·1혁명 당시 민족대표 33인 중의 한 사람이었고 이후 흥업구락부와 신간회에도 가담했던 목사 정춘수는 1938년 9월 4일 매일신보에 사죄의 글을 올리고 국방비 2천400원을 헌납했다. 그는 1940년 일제의 비호 아래 조선 감리교회의 수장인 감독으로 피선돼 청년 신도들을 일제의 지원병에 자원하라고 독려했다. 정춘수 목사와 친분이 있던 김조길도 그 무렵 전향했다. 선교구역 분할협정에 따라 남감리회 교회만 세울 수 있었던 춘천에서 1939년 김조길 등을 중심으로 남감리회를 이탈한 신자들이 장로교회를 세웠는데, 그 배경에 대해 2012년 발간된 《춘천동부교회 70년사》에서는 “민족의식이 강한 김조길 전도사가 1938년 신사참배 문제가 났을 때 무기력하게 순응하고 만 감리교회에 실망하거나 상록회 사건에 미온적으로 대처한 춘천교회에 실망했을 가능성”을 제기했다. 그러나 그러한 주장은 《매일신보》 1938년 6월 21일 기사를 보면 설 곳이 없다.

“석일昔日의 민족주의자 금일엔 애국운동, 춘천 김조길 씨 미행美行.” 《매일신보》 1938.06.21.
“석일昔日의 민족주의자 금일엔 애국운동, 춘천 김조길 씨 미행美行.” 《매일신보》 1938.06.21.

 

“과거의 잘못된 생각은 깨끗이 청산하였습니다. 약소한 돈이나마 국방비로 써 주십시오.”

매일신보는 평안여관 경영자인 김조길이 과거의 잘못을 회개하고 “항상 참된 황국신민이 되어 국가를 위해 봉사하겠다”라는 생각으로 국가 비상시에 그대로 있을 수 없다면서 100원의 거금을 국방비로 헌금한 미담 기사를 실었다. 7월 3일 춘천공회당에서 친일단체 춘천기독교연합회 발회식이 있었다. 위원장인 김광호 목사 사회로 거행된 발회식은 국가제창과 황국신민서사 제송 등 절차를 마치고 조선 총독과 중국에서 교전 중인 일본 육군과 해군 최고 사령관에게 감사의 전보를 보내기로 결정했다. “천황폐하 만세”를 삼창한 이들은 폐회 후 강원신사를 참배했는데, 당시 김조길은 이 단체에 재무위원으로 이름을 올렸다.               

전흥우(발행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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