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98년 신북면 마산리 출생…헌병·순사 거쳐 독립운동 위해 만주로
1928년 9월 화천으로 잠입해 3·1혁명 10주년 거사 기획하다 검거

1930년 12월 26일 서대문형무소에서 촬영한 박유덕.
1930년 12월 26일 서대문형무소에서 촬영한 박유덕.

 

‘춘천사람들’은 2016년 3월 2일, 3·1절 특집으로 “춘천 항일운동 비사, 지워진 이름 박유덕”이라는 제목의 기사를 보도했다.

1929년 3·1혁명 10주년을 앞두고 경성 본정서에서 이봉학이라는 청년을 검거했는데, 그의 정체는 기미년 만세운동 10주년에 전국적으로 대규모 만세운동을 벌일 목적으로 만주에서 잠입한 박유덕이었다는 것이다.

이 기사는 박유덕에 대해 “춘천군 신북면 마장리 박근성의 장남으로 1919년 만세운동으로 잡혀 온 춘천 군민 수십 명을 탈옥시키고 만주로 피신해 만주에서 사회주의 계열 독립운동을 한 소위 거물”이라고 소개했다. 이는 1929년 3월 7일 발행한 동아일보 기사를 인용한 것으로, 당시 동아일보 등 언론은 “기미년에 순사로 재직하며 수십 명 석방하고 탈주”라는 제목으로 이 사건을 대서특필했다.

박유덕은 조선공산당만주총국 북만도책임비서로 소개됐다. 그는 3·1혁명 10주년을 앞둔 1928년 9월경 만주에서 국내로 잠입했다. 3·1혁명 10주년을 기해 제2의 만세운동을 일으킬 목적이었다. 그의 은신처는 화천이었다. 춘천 출신으로 춘천헌병대와 화천경찰서에서 근무했기에 근방의 지리를 훤히 알고 있었다. 박유덕은 도보로 하루에 250리를 걸어 전국 30여 곳을 다니며 동지를 규합하고 돌아와 화천군 간동면 태산리에 있던 사립 광동학교 교사 김영래에게 전국에 배포할 격문 인쇄를 맡겼다. 그러나 이러한 정황은 얼마 지나지 않아 경찰에 탐지됐다.

2월 11일부터 춘천과 화천 일대는 일대 검거 선풍이 일었다. 그해 설날이 2월 10일 일요일이었는데 음력 정월 초하루부터 난리가 난 것이다. 화천에서 간동면 태산리 광동학교 교사 김영래와 정광복, 간동면 방천리 정태화, 하남면 거례리 서울청년회원 박제일, 조선일보 화천지국장 함병희, 화농청년회원 장창화·정진하 등이, 춘천에서 사북면 인람리 민정삼과 민병학, 춘천청년회원 박순택·염경환·신명수 등이 검거됐다. 박유덕은 경찰의 검거망을 피해 2월 12일 도보로 경성에 잠입했다. 그러나 결국 2월 28일 황금정 사거리에서 불심검문에 걸려 검거되고 말았다. 박유덕은 이봉학이란 가명 외에도 박병희·고전균·조을성 등 여러 이름을 사용한 것으로 밝혀졌다.

《동아일보》, 1929.03.07.
《동아일보》, 1929.03.07.

 

박유덕은 특히 춘천청년회원 염경환·박순택 등과 조선공산당 강원도 간부조직을 수립하기 위해 긴밀히 논의하고 염경환을 인제·양양 방면에 파견했다. 이로 인해 강원지역에서 30여 명이 검거됐다. 이 중 14명이 예심에 넘겨져 1929년 9월 10일 함병희·정원복·정은봉·신명수·박달현·이순동은 면소되고 나머지 8명이 재판에 회부돼 1년도 훨씬 지난 1930년 12월 17일에서야 최종 선고가 이루어졌다. 박유덕은 징역 5년, 화천군 화천면 풍산리 교원 장창화(22), 화천군 간동면 태산리 교원 김영래(33), 춘천군 신북면 마산리 농업 박순택(29), 횡성군 횡성면 읍성리 군서기 김병규(33), 춘천군 춘천면 가연리 기자 염경환(26), 양양군 양양면 남문리 기자 김두현(30), 양양군 양양면 월리 기자 김필선(28) 등 7명은 각 징역 1년을 선고받았다.

《동아일보》, 1929.03.08.
《동아일보》, 1929.03.08.

 

여기서 당시 언론에서 소개한 내용 중 두 가지는 검증이 필요하다. 우선 박유덕은 1919년 순사로 재직할 당시 만세운동으로 검거된 수십 명을 석방하고 탈주했는가? 이는 오보임이 틀림없다. 1929년 3월 20일 강원도경찰부에서 생산한 문서 ‘江高甲 제2123호’ 〈치안유지법 위반 범인 박유덕의 행동에 관한 件〉에 따르면, 박유덕은 스무 살이 되던 1918년 3월 춘천헌병대 율문출장소에서 헌병보조원으로 근무하기 시작했다. 그는 3·1 만세시위가 소강상태에 접어든 1919년 5월 본대로 복귀했는데, 3월 만세시위 당시 박유덕은 오히려 예수교 신도 김조길 등이 독립운동을 모의하는 걸 사전에 탐지하고 검거한 공으로 특무를 부여받아 김화·화천·양구·홍천 등에 출장을 다니며 고등경찰범죄 탐사에 종사했다. 그런데 역설적으로 이 과정에서 박유덕은 민족주의자들과 교유하며 감화돼 배일사상을 품게 됐다.

大正 八年 三月 所謂 萬歳騷擾ノ際 耶蘇敎徒 金兆吉 外 數名ガ 栗文出張所 所在地ニ於テ 獨立運動ヲ 爲スベク 陰謀セルヲ 探知シ 未然ニ 之ヲ 檢擧シタル 事例モアリ 當時 迄ハ 思想上 何等 容疑ノ點ヲ 認メザリシモ 特務トナリテ 金化 華川 楊口 洪川 等ニ 出張シ 高等警察犯罪ノ 探査ニ 從事シ 民族主義者等ト 交遊中 遂ニ 之ガ 感化ヲ 受ケテ 排日思想ヲ 抱持スルニ 至リ

그해 8월 20일 제도가 변경돼 헌병보조원들은 경찰서 소속 순사로 전직됐다. 박유덕은 화천경찰서로 발령이 났다. 그러나 일제의 식민통치에 대한 반감은 점점 커져만 갔다. 마침 당시 유행하던 콜레라 예방을 지원하기 위해 북신의주 용암포, 경성 본정서, 충무·강경 등 각 경찰서로 2개월간 출장을 다니던 과정에서 배일사상은 더욱 농후해졌다. 신의주에서는 해외 독립운동가들과 만났고, 경성에서는 민족주의자인 예수교 전도사 박연서와 친교를 맺었다. 그해 11월 화천경찰서로 복귀한 박유덕은 노골적으로 총독정치를 비난하는 등 언동이 과격해졌고 그 과정에서 경찰서장과 갈등을 빚다가 1920년 2월 퇴직했다.

박유덕은 이후 1922년 8월 만주로 넘어가기 전까지 2년여 동안 기독교에 입교해 경성 예수교 교역자 임시양성소와 예수교 성리학원 등에서 공부하고 춘천으로 돌아와 예배당과 여학당을 설치하기 위해 분주하게 뛰어다니며 민족사상을 고취하기 위한 활동을 벌였다.

다음으로 박유덕은 조선공산당만주총국 북만도책임비서가 맞는가? 만주에서 초기 공산주의운동을 주도한 인물은 박윤서다. 그는 1923년 6월 연길현 용정에서 고려공산청년회 간도지부를 결성하고 사회주의를 전파했다. 1924년 초 고려공산청년회 간도총국을 건립한 박윤서는 이후 러시아공산당과 공산청년회에서 제명된 후 간도총국을 ‘만주비서부’로 변경했다. 1926년 5월 조선공산당이 정식으로 조선공산당 만주총국을 결성하자 고려공산청년회 만주비서부는 조선공산당 만주총국에 편입됐다. 1927년 10월 제1차 간도공산당사건이 발생해 만주의 공산당 조직은 사실상 와해됐다. 1928년 1월 조선공산당으로부터 만주총국 위원에 임명된 박윤서는 블라디보스토크에서 만주비서부 계열(ML파)을 중심으로 조선공산당과 고려공산청년회 만주총국 재건을 주도했다.

김준엽·김창순 공저 《한국공산주의운동사》에 따르면, 이 무렵인 1927년 9월 1일 고려공산청년회 만주비서부의 이종희가 조선공산당 만주총국에 제출한 보고서 별지에 고려공산청년회 만주총국 위원으로 “李允秀·朴士·康進·韓益周·金光銀·韓士珉·朴秉熙”가 등장한다. 여기서 박사朴士는 박윤서이며, 박병희는 곧 박유덕의 가명이다. 다시 말해 박유덕이 국내에 잠입하기 1년 전에 고려공산청년회 만주총국 위원이었음이 확인된다. 이후 북만도책임비서가 됐을 수 있는데, 다만 조선공산당이 아니라 조선공산당 산하 고려공산청년회였다는 점은 지적할 필요가 있다.               

전흥우(발행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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