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자·청년운동가이자 신간회 춘천지회 간사로 활동
조선공산당 제3차 당대회 이후 고려공청 강원도 위원

“출옥한 7인”. 《동아일보》 1931.01.09. 사진 설명은 아래 오른쪽부터 염경환·장창화박순택이라고 돼 있지만, 맨 왼쪽이 염경환이고 맨 오른쪽이 박순택인 것으로 보인다.
“출옥한 7인”. 《동아일보》 1931.01.09. 사진 설명은 아래 오른쪽부터 염경환·장창화박순택이라고 돼 있지만, 맨 왼쪽이 염경환이고 맨 오른쪽이 박순택인 것으로 보인다.

 

지난 호에 다루었던 강원도 고려공산청년회 조직 사건과 관련해 박유덕과 함께 최종 기소되었던 박유덕 외 7명에 대한 선고 공판은 1930년 12월 24일에 있었다. 박유덕에게는 징역 5년, 춘천의 염경환·박순택과 화천의 장창화에게는 징역 1년이 선고됐고, 화천의 김영래, 횡성의 김병규, 양양의 김두선은 무죄로 석방됐다. 폐결핵으로 보석·출소했던 양양의 김필선도 별도의 재판이 열려 약 5개월 뒤인 1931년 5월 27일에 무죄를 선고받았다. 염경환·박순택·장창화는 1931년 1월 8일 형기를 마치고 출옥했다.

염경환이 기소될 당시인 1929년에 나이가 30세로 소개되었으니 1899년에 출생했을 것이다. 검거 당시에는 조선일보 춘천지국 기자였다. 염경환은 춘천에서 기자로 활동하며 청년운동을 비롯해 각종 사회운동을 주도했다.

1926년 5월 6일 조선일보 기사에 따르면, 그해 5월 2일 시대일보 춘천지국장이었던 염경환은 시내 대흥관에서 매일신보 강원지국장 박찬우와 기자 이한복·조준기, 조선일보 춘천지국장 신태현과 기자 박규영, 동아일보 춘천지국장 이강우, 부산일보 춘천지국의 고토 이쿠마(後藤幾馬), 대판조일신문 춘천통신부의 사세 죠타이(佐瀨丈太) 등 9명이 모여 춘천기자연합단을 조직했다. 아마도 염경환은 1926년을 전후해 시대일보 춘천지국장을 역임하다 시대일보가 1926년 8월 종간하면서 조선일보 춘천지국으로 옮겨 기자 신분을 이어간 것으로 보인다. 최남선이 1924년 3월 31일 창간한 시대일보는 그해 9월 18일 이상협이 판권을 인수해 11월 15일 중외일보로 제호를 변경하고 창간호를 발행했다.

이보다 1년 전인 1925년 8월 15일 춘천 청년 10여 명이 모여 춘천청년회를 창립했다. 이날 총회의 사회자는 이상학이었는데, 이상학은 1901년 신북면 천전리 출신으로 1920년 동경에 유학했다가 1923년 관동대지진으로 조선에 돌아온 후 서울청년회의 사상단체인 전진회에서 상무위원으로 활동하다 1927년 12월 25일경 만주로 건너간 인물이다. 염경환은 1926년 1월 8일 박제영·신명수·최석근·박순택 등과 더불어 춘천청년회와 별개로 춘천신진청년회를 발기하기도 했다. 1926년 3월 28일, 춘천청년회 제1회 정기총회 당시 간부는 서무부는 책임자 박달현과 상무 함창환, 교양부는 박순택, 선전부는 최연근·염경환, 조사부는 신명수·임정복이었다.

춘천청년회는 무산청년운동을 목적으로 한 서울청년회 계열의 사회주의 청년단체로서 주로 노동야학 설치, 독서회 개최, 소년회 조직 등의 활동을 벌였다. 1927년은 청년운동을 비롯해 사회운동이 최고조에 달한 시기였다. 각지에 조직된 청년회들은 이미 1925년 11월 평강 부괴청년회관에서 강원청년연맹을 결성했다. 1926년 11월 ‘정우회 선언’을 계기로 1927년 2월 15일 YMCA회관에서 신간회가 창립되면서 민족유일당운동이 활발하게 전개됐다. 이에 따라 강원청년연맹도 1927년 8월 10일 제2회 집행위원회에서 조직을 혁신하기로 하고 준비회를 구성했다. 이때 염경환도 준비위원으로 이름을 올렸다. 그해 9월 28일 강릉 금정예배당에서 열린 강원청년연맹 혁신대회에는 도내 30여 단체 대의원 80여 명을 포함 500여 명이 참석했다. 이날 강원청년연맹은 민족적 정치운동으로 방향 전환을 결정했다. 강원청년연맹의 집행위원장으로 한명찬이, 집행위원으로는 박용준·김필선·최용대·이명의·오일영·박제영·박순택·염경환·정의식·이동수·조탁·조훈석·정건화 등이 선출됐다.

강원청년연맹 혁신대회 이후 도내에서도 신간회 지회 결성이 본격화됐다. 1927년 10월 31일 원주지회를 필두로 11월 20일 양양지회, 12월 3일 강릉지회가 결성됐고, 1928년에는 1월 16일 고성지회, 1월 29일 이천지회, 3월 11일 삼척지회가 결성됐다. 양구에서도 뒤늦게 1929년 2월 19일 지회를 설립했다. 신간회 춘천지회가 언제 설립됐는지 정확한 기록을 확인할 수는 없지만, 신간회 경성지회 제3회 임시총회 개최와 관련해 1928년 1월 10일 종로경찰서장이 경성지방법원 검사정 앞으로 보낸 비밀문서 ‘鐘路警高秘 제642호’에 춘천지회에서 축전을 보낸 것으로 확인돼 신간회 춘천지회도 1927년 말쯤 설립됐을 것으로 보인다. 당시 신간회 춘천지회의 간사를 염경환이 맡았던 것으로 알려졌다.

한편, 1925년 4월 17일 화요회와 북풍회 주도로 조선공산당(조공)이 창당된 이후 그해 11월 신의주사건(1차 공산당사건)과 1926년 6·10만세운동(2차 공산당사건)으로 조공은 치명적인 타격을 입었다. 이에 따라 1926년 12월 6일의 2차 당대회를 주도한 일월회는 서울파 사회주의그룹인 고려공산동맹을 합류시키고 ‘정우회 선언’의 연장선에서 신간회 결성에 적극적으로 나섰다. 당시(1927년 3월) 조공의 강원도 책임비서는 함연호였고, 위원은 한명찬·정의식이었다. 한명찬은 고려공산청년회(고려공청) 강원도 책임비서였다.

1928년 2월 제3차 공산당사건 직후 열린 3차 당대회에서 노동자 출신 차금봉이 책임비서로 선출됐을 때도 강원도 책임비서는 함연호였는데 고려공청 책임비서는 정의식으로 교체됐다. 이때 고려공청 위원으로 염경환과 김필선이 합류했다. 그러나 그해 7월부터 다시 일제 검거가 시작됐다. 4차 공산당사건으로 조공은 조직이 거의 와해됐다. 4차 공산당사건 직전인 1928년 5월 8일, 고려공청 강원도 책임비서인 철원의 정의식과 함께 춘천의 염경환, 강릉의 조근환·정윤시, 간성의 함연호, 원주의 정동호 외 8명, 양양의 김두선·최용대·김동환·박정양·이학규·최우집·오일영, 삼척의 심부윤 등 도내 사회주의자 20여 명이 대거 검거됐다. 염경환은 9월 23일 석방됐다. 이 무렵 간도공산당사건이 터졌고 박유덕이 국내로 잠입해 염경환은 1929년 2월 박유덕 사건으로 다시 체포돼 1931년 1월 8일까지 약 2년 동안 감옥살이를 했다. 4차 공산당사건과 박유덕 사건으로 인해 1928년 5월 이후 춘천뿐만 아니라 강원도 전역에서 더 이상 사회운동을 전개할 여건이 아니었다.

염경환은 1932년 5월 11일 휴간 중인 조선중앙일보 지국장대회 준비위원과 같은 달 23일 중앙일보사 창립위원으로 참여했는데, 그 뒤의 행적은 알 수 없다. 다만, 1938년 3월 31일 조선일보 ‘사고社告’에 염경환이 삼척지국장으로 발령이 났는데, 동일 인물일 가능성이 높다.                        

전흥우(발행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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