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성들의 원성을 산 대궐과 대원군 이야기 2’

청오 차상찬.
청오 차상찬.

이 글은 1927년 1월 1일 발간된 《별건곤》 제3호에 실렸다. 대원군은 경복궁을 짓고 왕조의 무궁한 번영을 기원했으나 불과 사십여 년 만에 조선은 멸망하게 되었다. 허망한 꿈을 비웃는 차상찬의 펜촉이 날카롭게 빛나는 글이다. ‘백성들의 원성을 산 대궐과 대원군 이야기’를 지난 호에 이어서 계속 들어보자.

대원군의 큰 그림

가까운 수백 년간에 국가는 외란과 당쟁으로 말미암아 정치가 극히 부진하고 재정이 또한 고갈하니 경복궁 중건의 대공사와 같은 것은 여러 제왕 중에 누구도 감히 엄두를 내지 못하였었다. 그 뒤 순조 말년에 익종이 정무를 대리할 때 중건을 의논하였으나 불행히도 그가 일찍 사망하니 그 계획 또한 물거품이 되고 말았다. 

그러다가 고종황제가 등극(1863년)하고 황부 대원군이 섭정(1866년부터)하니 그는 근대 이조의 대표 인물이다. 예컨대 봉건시대적 영웅 기분을 적나라하게 발휘하여 외척 정치를 퇴치하고 왕권 부흥을 계도하는 동시에 권문세족을 굴복시키고 제왕의 권위를 발휘함에는 무엇보다도 역대로부터 숙원인 경복궁을 먼저 중건하는 것이 옳다고 생각하고 만 가지 어려움을 제치고 영건도감을 설치하여 영상 조두순, 좌의정 김병학을 도제조 총감으로 임명하고 흥인군 이최응(대원군 실형)과 그의 심복인 이경하를 제조로 임명하고 본인은 공사의 주재가 되어 대공사에 착수하였으니 때는 고종 2년(1865년) 을축 4월이었다.

석경루 안에 있는 백옥배

그러나 다년간 당장의 편안한 단꿈을 쫓던 당시의 관료와 인민은 비록 대원군 세력에 눌려서 어떠한 반대도 못 하나 내심에는 그다지 기쁘게 복종하지 않았다. 그것을 알게 된 대원근은 먼저 대왕대비 조 씨의 환심을 사고 일반 사람들의 의구심을 풀려고 백방으로 고심하던 중에 마침 박경회라는 사람이 창의문 밖 석경루(추사 김정희의 별장) 옛터에서 수진보작이라고 새겨진(만수무강을 비는 보배로운 잔) 잔 한 개를 발견하여 진상하였다. 대원군이 크게 기뻐하며 이것은 천사가 우리의 대공사를 축하함이라고 하여 대비에게 바치고 〈수진보작명첩〉을 지어서 일반의 민심을 선양시켰다. 그와 같은 방법으로 다시 경회루 주춧돌 밑에 “왕궁조영 국조무궁(경복궁을 지으면 나라가 무궁하리라”의 8자를 새긴 옥쟁반을 몰래 매장하였다가 일꾼들로 하여금 발견하게 하였다. 또한, 궁중과 일반에 전시하여 경복궁의 중건은 하늘의 명령이요, 국가의 행복이란 것을 믿게 하였다. 지금에 생각하면 한 우스운 이야기 같지만, 당시 천하를 압도하던 영웅임에도 인심을 수습하는 데 그 얼마나 고심했는지를 가히 충분히 추측할 수 있다.

소위 주먹당상과 벼락감투

무슨 사업이든지 재정 곤란이 큰 문제이지만은 경복궁 공사 중에 재정 궁핍은 문제 중에도 가장 큰 문제였다. 아무리 뇌물을 엄금하고 과거의 매관매직하든 악덕 정치를 일소한 대원군이라도 재정이 곤란한 데는 어찌할 수가 없었다. 그리하여 비록 양심이 허락치 않으나 그때그때 둘러대는 대원군도 천하 팔도의 부호에게 강제로 기부금을 징수하고, 기금액의 많고 적음에 따라 관작의 고하를 주니 일시 매관의 풍이 성행하여 소위 ‘주먹 당상과 벼락감투’라는 말까지 생겼다. 이것이 소위 말하는 ‘원납세’이다. 그리고 또 결혼하는 남녀에게 납세하는 의무를 부여하여 소위 ‘결발세’를 시행함으로 그 공사 중에는 돈 없는 청춘남녀는 혼인도 하지 못하는 사실이 있었고, 사대문에 출입하는 사람에게 ‘통행세’를 받음으로써 주머니에 돈 푼이 없는 사람은 출입도 잘 못 하였으며 결전에는 ‘결두세(전답세 매결당)’ 얼마씩을 부가하였다. 이것은 신랄하고 맹렬한 대원군의 정치가 아니고는 볼 수 없는 일이요, 또 일반 민원의 초점이 되어 후일 대원군 배척 운동의 하나의 구실이 되었던 것이다.

라태랑(차상찬읽기모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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