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유산으로 소풍가자 ③

 

지난주 비가 몇 차례 지나가고 꽃샘추위가 몸을 한껏 움츠리게 했는데, 일요일 아침 기공체조를 마치고 텀블러에 커피를 담는 시간에 거짓말처럼 봄 햇살이 큰 통창으로 쏟아져 들어왔다. 새 학기를 맞이해 옛 서당이었던 ‘동천서숙東川書塾’의 자취가 남아 있는 고은리로 봄 소풍을 떠날 채비를 마치고 지내리 마을 길을 돌아 외곽도로로 나섰다. 

고은리 복숭아밭은 아직 복숭아꽃이 피기에는 이르지만, 마치 나뭇가지마다 팔다리 쭉쭉 기지개 켜고 위아래로 봄물을 실어나르는 나무의 부지런한 몸놀림이 보이는 듯했다. 겨우내 몸을 감싸고 있던 외피를 뚫고 ‘아싸! 때가 됐다’ 소리치며 봄 잎이 쏙, 봄꽃이 화들짝 튀어 오를 것만 같은 알싸하게 따뜻한 봄날이다. 지금 과수원 사이로 바삐 움직이는 농부들은 잔가지를 솎아내는 가지치기를 하고 밑거름을 준비 중이라고 사과 농사를 짓는 한희민 박사가 말했다. 봄이면 과수원 바닥에 쌓인 낙엽 등을 모아 태워 병충해로부터 과실수를 보호하기도 했는데, 지금은 기계를 이용해 잘게 잘라서 정리한다고 한다.

 

‘동천서숙’은 윤사국尹師國(1728~1809)이 강원도관찰사로 왔을 때 윤기오尹基五 등 여러 사람들과 함께 만든 글방이다. 복숭아 과실수 농사를 주로 짓는 아늑한 산동네인 고은리 소재 ‘칠원윤씨 동천비각’에 그의 필적을 볼 수 있는 ‘동천서숙기東川書塾記’와 현판이 남아 있다. 기문은 1790년 가을에 썼으며, 현판에는 “辛亥 宗人 三山老樵 書”라고 되어 있는데, ‘삼산노초三山老樵’는 노년에 쓰던 윤사국의 호로 보인다.

“내가 관찰사로서 각 고을을 순행하다 춘천에 도착하여 이내 동천에 들어서서 그의 아들과 아우들을 보니 모두 준수하여 가르칠 만하였다. 그러나 그 학업을 물어보니 모두 집이 가난하여 스승을 따를 방도와 학업을 익힐 곳이 없다고 하였다. 내가 듣고 측은하게 생각하여 즉시 약간의 관찰사의 늠여(녹봉)를 출연하여 먼저 서당을 짓고, 또한 여러 종인으로 하여금 각자 열 말의 곡식을 내어 계를 조직하고 이자를 취하여 스승을 모시고 학업을 강론하는 밑거름으로 삼게 하였다.”

- ‘동천서숙기’ 

(춘천역사문화연구회,《춘천문화유산총람》, 2021.)

녹봉을 내어 서당을 짓고 계를 조직해 운영의 밑거름으로 삼았다니 그의 멋진 글씨만큼 도덕적 책임감도 뛰어난 인물임에 틀림이 없다. 서예에 뛰어난 재주가 있어 조정의 금보·옥책과 당시 사찰·누관의 편액을 많이 썼다고 한다.

 

윤사국은 ‘동천서숙’뿐만 아니라 강원도관찰사로서 영월의 자규루를 복원하기도 했고, 안동현감으로 있을 때는 계를 결성하여 선조들의 묘소를 살피고 서당을 짓고 책을 간행하는 등 학업을 장려하였다니 교육에 관한 관심이 많은 선량이었나 보다.

 

동천서숙의 정확한 위치는 아직도 모른다고 한다. 한희민 박사는 ‘동천’은 칠원 윤씨의 집성촌이 있었던 지금의 우두배터 건너 하일이거나 장학리 만천천과 신촌천으로 볼 수 있는데 지명이 남아 있지 않아 아쉽다고 말했다.

정갈하게 쓰인 그의 기문과 현판, 몇백 년의 세월을 지나 글로 남아 있는 그의 자취를 본다. 글은 그의 정신을 담고 있고 필적은 그의 마음을 담고 있는 듯 보인다. 가난한 친척들의 교육을 살피는 마음이 따뜻하다.

농사를 멈추고 휴식을 취하는 농부들을 바라보며 우리 일행도 산기슭 농막으로 내려가는 계단에 자리를 잡았다. 봄 햇살은 정수리를 지나 서쪽 하늘을 향하고 계단에 털썩 주저앉아 빵과 커피를 나누다 우리 소풍이 문득 너무 행복해서 혼자 슬그머니 웃음을 날려 본다. 산기슭에서 내려다보는 춘천의 오늘이 참 예쁘기만 하다.

‘복숭아꽃이 만발할 때 다시 올 거야’라고 다짐하면서 뒤돌아보니 ‘칠원윤씨 동천비각’을 가운데 두고 이미 만발한 복숭아꽃이 봄바람에 날리고 달콤한 복숭아 향기가 골 안에 가득하다. 꽃이 피기도 전에 이곳은 이미 내 맘속 이상향이고 무릉도원이다.

 

원미경 시민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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