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37년 3월 14일 조직…독서회 통해 항일의식 이어가
후배들은 관동의원 원장 이임수 통해 여운형과 교류하기도

춘천고 전신인 100년 전의 춘천고보. 사진=춘천디지털기록관. 출처는 《춘고 60년사》.
춘천고 전신인 100년 전의 춘천고보. 사진=춘천디지털기록관. 출처는 《춘고 60년사》.

 

1937년 중일전쟁 이후 일제는 ‘내선일체內鮮一體’, 곧 일본과 조선은 한 몸이라며 민족말살정책인 황국신민화 정책을 내세워 조선인들을 전쟁에 동원했다. 가장 온건한 민족주의조차 용납하지 않았다. 그런 와중에 춘천에서 ‘상록회常綠會’ 사건이 터졌다.

상록회는 춘천중과 춘천고의 전신인 춘천고등보통학교(춘천고보) 학생들의 비밀결사였다. 1937년 3월 14일 춘천고보 5학년 남궁태·이찬우·문세현·용환각·백흥기·조규석 등 6명이 조직했다. 이들은 ▲회원으로서 자기완성 ▲지도자로서 책임완수 ▲단결력 배양으로 헌신적 항일투쟁을 3대 강령으로 내세웠다. 회장 조규석, 부회장 남궁태, 선전부장 문세현, 조직부장 이찬우, 서적부장 백흥기, 회계 용환각으로 역할을 나눴다. 이후 회원이 늘어나면서 독서회를 조직해 은밀히 사상 교양 운동을 벌여나갔다. 독서회 회장은 용환각, 부회장은 남궁태가 맡았다. 이들은 인근 춘천농업학교는 물론이고 멀리 서울·함흥·평양의 학생들과도 연락을 주고받으며 민족의식을 고취하기 위해 노력했다.

1938년 3월 상록회 초기 회원들이 대부분 졸업하면서 회장 이연호, 부회장 최기수, 서적계 신기철, 회계 박일환으로 조직을 개편했다. 졸업생들은 만주로 가서 활동을 이어갔다. 남궁태는 하얼빈에서, 이찬우는 길림에서, 문세현과 백흥기는 간도에서 활동했다. 그러나 1년 반 정도 비밀리에 활동하던 상록회는 1938년 가을, 일경의 정보망에 걸려들었다. 그해 가을부터 이듬해 초까지 모두 137명이 검거됐다. 이 중 십수 명이 1년 넘게 가혹한 조사를 받고 재판에 넘겨져 1939년 12월 27일 실형을 선고받았다. 남궁태·이찬우·문세현·용환각·백흥기·조규석·배근석·조흥환·이연호·신기철은 치안유지법 위반으로 징역 2년 6개월을, 전홍기·차주환은 징역 1년 6개월 집행유예 3년을 선고받았다. 이 중 백흥기는 안타깝게도 고문의 후유증으로 옥사했다. 약 20일 뒤인 1940년 1월 17일에는 졸업생인 이홍채·신영철·박우홍·이종식 등 4명에게 징역 1년에서 1년 6개월에 집행유예 3년이 선고됐다.

이런 와중에 1938년 4월 1일, 춘천고보는 ‘조선교육령’ 개정으로 춘천중학교로 이름이 바뀌었다. 상록회 사건으로 선배들이 대거 검거돼 재판을 받는 상황에서 관동의원 원장 이임수의 아들 이란을 중심으로 한 춘천중 학생들은 또 다른 독서회 활동을 이어갔다. 이들은 선배들의 전철을 밟지 않으려고 조직의 이름도 정하지 않았다. 특히 1937년 11월 상록회보다 6개월 정도 늦게 조직된 춘천농업학교 독서회가 3년간이나 보안을 유지하며 활동하다 1940년 12월 10일 적발돼 대거 검거되면서 위기감이 한층 더 심해졌지만, 이들은 활동을 멈추지 않았다.

이란 등 춘천중 학생들은 시내의 북성당서점에서 심훈이나 이광수 등의 저서를 구해 읽고 토론하기도 했고, 이란의 아버지 이임수와 친분이 깊었던 여운형이 관동의원을 방문할 때마다 우르르 몰려가 ‘간디’나 ‘임시정부’ 등 세상 돌아가는 이야기에 귀를 쫑긋 세우기도 했다. 여름방학을 이용해 서울에 있는 여운형 집을 방문해 새로운 견문을 넓히기도 했다.

“조선어 소설이나 조선 역사를 통하여 민족의식이 싹틀 무렵 당시의 독립운동가요 학생지도자로서 명성이 높았던 여운형 씨가 부친과의 친교로 자주 춘천에 왕래했다. 때로는 급우와 같이 그분의 지도를 받게 되어 해외에서의 독립운동의 현황, 중일전쟁의 장래, 조선인 학생의 진로 등을 듣게 되어 장차 세상을 바라보는 시야가 넓어져 감은 물론, 반일의식이 더욱 굳어진 것 같다.”

1985년 펴낸 《춘고 60년사》에 실린 이란 씨의 회고담 중 일부다. 그의 회고담에 의하면, 사창리 고개 너머에 평강 출신의 권혁민·김균하와 철원 출신의 최규태가 한 집에 하숙하고 있었고, 소양통2가에는 회양 출신 김영근 형제와 횡성 출신의 이유식, 원주 출신의 김기봉이, 그 옆집에는 홍천 출신 이광훈과 정선 출신 고웅주가, 또 그 근처에는 횡성 출신 심재영·원후정과 통천 출신 윤익섭, 평강 출신 백순호가 같은 하숙집에 살았다. 약사리에는 김화 출신 고재훈과 울진 출신 임희식이 같은 집에 살아 서로 어울리며 다정한 그룹을 형성하면서 자연스럽게 의기투합이 됐다고 한다.

그러나 이들의 활동도 2년 정도 지난 1941년 3월에 마침표를 찍었다. 일본인 학생들과 충돌한 사건이 벌어지면서 독서회가 발각됐다. 그해 3월 23일 새벽 6시, 사이렌 소리를 신호로 일경이 관련 학생들의 자택과 하숙집에 들이닥쳤다. 24명의 학생이 여운형과 한 번이라도 만났거나 임시정부 활동에 대해 입에 올린 적이 있으면 치안유지법 위반으로, 일본인 학생을 한 번이라도 때렸으면 폭행죄로 입건됐다. 겨우 15~16세에 지나지 않는 청소년들이었지만, 일경의 고문에는 인정이 없었다. 그해 11월 10일 12명이 경성지방법원으로 송치돼 1942년 5월 19일, 치안유지법 위반과 폭행 등으로 적게는 6월에서 많게는 3년의 실형이 선고됐다. 이란·윤익섭·최규태·고웅주·이광훈 5명에게는 치안유지법 위반이, 박영한·고제훈 2명에게는 폭행죄, 원후정·권혁민·김영근·김도식·심재진 5명에게는 치안유지법 위반과 폭행죄가 모두 적용됐다. 이 중 이광훈은 인천소년형무소에서, 고웅주는 김천소년형무소에서 고문 후유증과 영양실조로 옥사했다. 열일곱 어린 나이였다. 나머지는 해방 후에나 감옥 문을 나올 수 있었다.

두 차례의 상록회·독서회 사건 이전부터 춘천고보 학생들은 여러 차례 동맹휴학을 통해 민족차별에 저항했다. 1926년 10월과 1935년 7월에 일본인 교사의 가혹행위가 발단이 되어 동맹휴학이 있었고, 1929년 10월 30일 터진 광주학생운동이 1929년 말부터 1930년 초까지 전국적 항쟁으로 번져 나갈 때에는 곽재원·이창호·정원식·김영일 등을 중심으로 전교생이 동맹휴학에 들어 운동장에서 ‘조선독립만세’를 외치다 교실에 감금되자 폭력시위로 번지기도 했다. 당시 전국적으로 194개 학교에서 5만4천여 명의 학생이 참여해 퇴학만 582명이고 무기정학을 당한 학생도 2천330명이나 됐다.

춘천중·춘천고가 꼭 한 달 뒤면 개교 100주년을 맞는다. 1924년 4월 25일 관립으로 개교한 춘천고보는 1925년 3월 31일 현 춘천고 위치로 이전하고 4월 1일 공립으로 변경됐다. 1938년 공립중학교로 변경됐다가 한국전쟁 직전인 1950년 6월 1일 중학교와 고등학교로 분리됐다. 춘천고보라는 한 뿌리에서 나온 춘천중과 춘천고 개교 100주년을 축하한다.                        

춘천고 개교 43주년인 1967년 ‘상록회’를 기리기 위해 교정에 세운 ‘상록탑’.
춘천고 개교 43주년인 1967년 ‘상록회’를 기리기 위해 교정에 세운 ‘상록탑’.

 

전흥우(발행인)

※ ‘춘천100년사’는 이것을 끝으로 잠시 쉬어갑니다. 4월부터는 동학농민혁명 130주년을 맞아 ‘동학의 요람, 강원도’를 연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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