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민정 강원이주여성상담소  베트남 상담사
이민정 강원이주여성상담소  베트남 상담사

날이 풀렸다. 춘천으로 이주하여 열 번째 맞는 봄이다. 춘천의 사계가 적응하기 어려웠는데 이제는 견딜 만하다. 겨울이 끝날 즈음이면 서로를 부르는 목소리에 윤기가 느껴져서 좋다. 겨우내 꽝꽝 얼어 단단했던 얼음이 풀리면서 사람들의 마음도 풀리는 것 같다. 강변을 산책하면서 만나는 나무들의 물오르는 모습도 좋다. 이제는 제법 설레며 봄을 기다린다. 

껀터를 떠나 이곳에 와서 만난 첫 계절은 겨울이었다. 눈 쌓인 길을 따라 들어간 골목 안 끝 집, 겨울 햇살이 길게 들던 어머님 방에는 붉은 꽃이 피고 있었다. 알아들을 수 없는 언어로 인사말이 끝나고 어머님집을 나오며 꽃 이름이 무엇인지 물었다. 동백이라 했다. 동백은 껀터의 히비스커스를 닮았다. 내가 나고 자란 껀터는 메콩강의 하류에 있으면서 사계절 꽃이 핀다. 껀터는 9월부터 강이 범람하여 1월 음력설이 다가오면 모든 지류와 운하가 만수滿水에 이르고 강을 따라 꽃시장이 열린다. 꽃나무를 실은 배들이 강을 따라 올라오면서 강변에는 온갖 꽃들이 만개한다. 우리 집은 강의 하류에 있었다. 물 위의 집, 어머니는 강 하류에 있던 우리 집으로 꽃장수를 부르고 아버지가 새벽에 잡아 온 생선과 꽃나무를 바꾸었다. 어머니는 주로 붉은 꽃이 만개한 히비스커스를 샀는데 그것이 동백과 닮았다. 

베트남에서 온 동향 친구가 강 건너 나무 시장에 가자고 했다. 소양강을 건너 육림공원에서 조금 더 가니 나무 시장이 있었다. 언 땅이 녹으면서 길이 질척했다. 라일락·장미 같은 꽃나무 묘목들과 체리·자두·사과 같은 과일나무 묘목들도 있었다. 친구는 텃밭에 심겠다며 체리와 사과나무를 샀다. 나보다 먼저 이주한 친구는 남편과 주말농장을 하고 있었다. 언젠가 이즈음 소양강댐 아래 유포리 막국수 집 근처를 지나다 본 사과 과수원이 생각났다. 철망 너머 하얀 꽃잎이 날리던 과수원은 고향 강가에 피던 흰 연꽃을 떠올리게 했다. 트럭을 가지고 온 사람들이 황토를 밟고 이리저리 나무 사이를 지나다녔다. 꼬리표를 매단 묘목들이 줄지어 있다. 잎이 없는 묘목들은 황토 위에서 몸 전체가 바람에 휘어졌다. 언젠가 나도 저렇게 휘어진 적이 있다. 묘목에게 잎이 없다면 내게는 견딜 만한 뿌리가 없었다.

나는 토분에 심어진 ‘미스김라일락’을 샀다. 나무 시장 직원이 지금은 비록 마르고 삐죽한 줄기에 불과 하지만 정성을 다해 잘 돌보면 보라색 꽃을 피운다고 했다. 미스김라일락은 미국인 식물 채집가가 북한산 백운대에서 털개회나무 종자를 채취하여 미국으로 가져가 개량해서 만든 품종이다. 품종 이름 ‘Miss Kim Lilac, Syringa Paula Miss Kim’은 당시 자료를 도왔던 한국인 타자원의 성을 붙여서 만든 것이라고 했다. 미스김라일락은 한국에서 미국으로 갔다가 개량되어 다시 한국으로 왔다.

나무는 그곳이 어디 건 심어진 땅에서 뿌리를 내리고 싹을 틔우고 꽃을 피운다. 나도 단단히 뿌리 내릴 준비를 한다. 한꺼번에 몸이 휘어졌던 어제는 잊기로 하자. 곧 뿌리에 힘이 생기고 줄기에 물이 오를 것이다. 이미 와 있을 봄을 기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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