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딜레탕트’는 예술이나 학문을 치열한 직업의식 없이 취미로 즐기는 것을 말한다. 이렇게 되면 자신의 굳건한 입장을 취하지 않고 이것도 좋고 저것도 좋다고 하게 된다. 단지 삶과 사회를 구성하는 모든 것들을 폭넓은 취미의 재료로만 보는 것이다. 그래서 딜레탕트(dilettante)는 ‘즐기는 사람’이다. 학문, 예술, 종교, 정치를 즐기기만 하니까 어설픈 전문가가 되고, ‘선무당’이 되어 사람을 잡게 되고, 마침내 스스로 잡히는 것이다.
이 잡고 잡히는 현상을 ‘테러(terror)’라고 하며 이것이 사회현상으로 나타나면 ‘테러리즘(terrorism)’이 된다. 그러면 테러는 뭔가? 폭력을 사용해 적이나 상대편을 위협하거나 공포에 빠뜨리게 하는 행위다. 또 정치적인 목적을 위하여 개인이나 대중 또는 정부에게 위협을 가하거나 폭력을 행사하는 조직적 행위도 이에 해당한다.

IS의 테러로 프랑스에서 수백 명이 살해됐다. 터키 전투기는 자기네 영공에 들어온 러시아 전투기를 쏘아 떨어뜨렸다. 이 모두 명백한 테러다. 광화문 광장에서 국가권력과 대중시위대가 붙어서 공권력은 조롱당하고, 시민들은 다쳤다. 이 또한 양자 간의 명백한 테러다. 어떤 동네 이장이 마을을 발전시키라고 받은 돈을 개인용도로 쓰거나, 길거리를 지나가는 행인의 뒤통수를 치고
돈을 빼앗아가거나, 군대의 상급자가 하급자를 인간이하로 취급하거나, 상사가 여직원을 성추행하거나 하는 것들이 모두 테러의 범주에 든다.

테러는 말 그대로 ‘나쁜 일 혹은 불행한 사건’이고, 세상은 ‘테러’에 의해 구동되고 있으므로 국가나 개인의 윤리와 운영체제는 ‘불행한 일’을 억제하고 방어하는데 총력을 기울이고 있다. 그리고 그 테러를 심판하고 비난하는 것이다. 당연히 그래야 하고 사회와 구성원은 온갖 테러에 대한 저항력을 향상시켜야 한다. 그런데 문제는 개인 간에 발생하는 테러와 달리 정치권력이 국민을 대상으로 저지르는 테러, 국가권력이 국민 대중을 상대로 벌이는 테러, 심지어는 종교가 신앙을 빙자하여 신도들에게 가하는 ‘종교적 테러’는 억제당하고 방어되지 않는다는데 있다.

개인 간의 테러는 파놉티콘(pan-opticon)이 되어 감시되고 통제되고 있다. 그러나 국가권력, 정치권력, 종교권력에 의해 저질러지는 테러는 그 실상을 간파하기에 역부족이다. 테러라고 자각하지 못하고 테러를 당하게 된다는 뜻이고, 역부족이라는 말은 누구나 속수무책으로 당하게 된다는 것이다. 왜 그럴까?

앎을 추구하지 않고 정보만 습득하기 때문이다. 정보사회란 세상의 모든 이치를 알게 하지 않는다. 단지 ‘수박 겉핥기 식’으로 받아들여 즐기도록 유혹하기만 한다. 이것이 딜레탕트(dilettante)고, 이렇게 딜레탕트(dilettante)되는 순간 테러를 당해 파괴가 일어나는 것이다.

앎은 정보와는 다른 무엇이다. 오늘날 앎과 진리는 낡아빠진 개념으로 취급된다. 책을 읽거나 스승에게 배워서 알려고 하지 않고 스마트폰에서 손가락 한 번 까딱 함으로 정보를 구하는 일에서 극명히 알 수 있다. 앎은 정보와는 다른 시간 구조를 가지고 있기 때문에 과거와 미래 사이에 걸쳐 있는 것들을 통전하지 않으면 얻을 수 없는 것이다. 앎은 그래서 무한성이다. 그러나 정보는 현재에 일어나는 시청각 작용이다. 그것은 경험에 기반을 두는 게 아니라 단지 보이는 것에 근거한다.

바로 이것, 우리가 경계하고 두려워해야 하는 것은 눈에 보이는 세상 밖의 테러가 아니라 눈에 보이지 않는 권력사회 시스템 속에서의 테러다. 아니, 그런 테러에 대한 고통의 경험을 끄집어내고 공유해야 한다. 그리고 좀 더 면밀하고 확실하게 정치, 경제, 국가권력, 종교에 대해서 배워야 한다. 깊이 배워야 한다. 시민사회가 발전하려면 딜레탕트(dilettante)로 인한 폐해 즉 몰라서 당하는, 보이지 않는 테러에 아파하고 그것을 극복하고 저항하기 위해 적극적으로 움직여야한다. 이것이 딜레탕트한 세상에서 인간으로 살기다.

허태수 (성암감리교회 담임목사)

 

저작권자 © 《춘천사람들》 - 춘천시민의 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