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시아 (시인)
금시아 (시인)

우리 속담에 ‘내리사랑은 있어도 치사랑은 없다’라는 말이 있다. ‘내가 너를 어떻게 길렀는데’라는 회한은 쉽게 되풀이 된다. 그것은 우리가 오랜 세월 삶의 경험에서 오는 소중한 교훈들을 자꾸 잊는 까닭인지도 모른다. 

얼마 전 장안의 중심에 선 화제의 드라마가 있었다. 대한민국 상위 0.1%가 모여 산다는 ‘SKY 캐슬’. 그곳은 특권층들이 자식을 통해 자신의 욕망을 실현하려는 부모들과 그들만의 방식으로 특별한 입시교육과 보호를 받는 아이들의 감옥이다. 사랑이란 허울 아래 부모와 자식은 점점 괴물이 되어간다. 드라마 ‘SKY 캐슬’은 목적을 향해 돌진하는 부모와 자식의 ‘상호 노예화’ 과정을 그리고 있다. 그런데 이것이 비단 우리 한국사회의 교육제도와 어떤 특별 계층으로 인해 드러난 문제점이라고만 할 수 있을까? 

《고리오 영감》은 프랑스 작가 발자크의 장편소설이다. 1819년 파리 근교, 진흙 구덩이 속에 소위 고급 하숙집이라는 ‘보케르의 집’이 있다. 그곳에는 주인공 고리오 영감과 또 다른 주인공이자 화자인 ‘으젠 드 라스티냐크’ 그리고 온갖 무늬의 군상들이 들락거리며 살아간다. 

고리오는 일찍이 제면업으로 성공한 백만장자다. 부인이 일찍 죽자 그는 두 딸에게 무분별한 사랑을 쏟으며 헌신한다. 자신에겐 한 푼이라도 아끼면서 두 딸은 특권층 자녀처럼 키웠다. 그리고 거액의 지참금으로 귀족과 결혼시켜 상류사회로 내보냈다. 그의 유일한 행복은 딸들을 충족시키는 것이었기에 딸들이 저지르는 나쁜 일까지 사랑했다. 두 딸을 천사의 대열에 올려놓았지만 고리오는 빈털터리가 됐고 그녀들은 초라한 아버지를 부끄러워했다. 아버지의 임종도 보러오지 않았다. 그는 죽음에 이르러서야 자신의 사랑이 노예의 사랑이었다는 것을 깨닫고 회한에 젖는다. 라스티냐크만 비참한 그의 죽음을 배웅한다.

시골에서 올라온 가난한 청년 라스티냐크는 신분 상승을 위해 사교계의 여자를 만나 영화로운 생활을 꿈꾸는 야심가다. 돈 많은 귀족부인이자 고리오의 둘째 딸인 델핀을 만나 성공하려는 야망에 들떠 있었다. 그러나 그는 입신출세라는 삶의 실상에서 ‘사회라는 커다란 책’을 읽으며 출세하려면 도의심을 떨쳐버리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을 깨닫는다. 그에게 가정이란 속임수 같아 보이고 반항도 불가능해 보인다. 진흙탕의 삶 속에서 속세와의 투쟁을 선택한 라스티냐크는 델핀이 준 시계를 전당포에 잡히고 고리오의 장례식을 치른다. 그리고 그의 무덤에서 파리의 불빛을 바라보며 부르짖는다. “네놈과 나의 단판싸움이다.” 

드라마 ‘SKY 캐슬’은 돌연 서로 반성하고 화해하며 해피엔딩으로 끝났다. 그러나 소설 《고리오 영감》에는 발자크의 사실적이면서 냉혹한 시선이 잘 드러나 있다. 그의 작품은 근대사회의 상징인 파리의 영화와 악덕, 그리고 금전만능의 사회를 통렬하게 고발하고 풍자한다. 소설의 교과서, 전범이라 불리는 발자크의 섬세한 묘사와 심리적 사실주의는 그를 19세기 위대한 예술가의 반열에 올려놓았다.

계층과 계급의 우위에 있거나, 사랑을 오인하는 어른들의 욕망은 결국 아이들을 괴물로 만든다. 그럼에도 ‘SKY 캐슬’의 인기와 더불어 ‘입시 코디’와 ‘학종’이나 드라마에 나온 소품에 대한 궁금증이 인터넷을 달군다니 드라마의 주제와 현실의 양상은 캐슬 안과 캐슬 바깥처럼 딴판이다. ‘인간적인 삶’이란 무엇일까? 세상의 아이러니는 진정한 공정함과는 거리가 있어 보여 백만장자 고리오의 죽음처럼 참 씁쓸하다. 

문득 노자의 글귀 하나가 가슴을 파고든다. 

천지(天地)는 어질지 못하다. 천지는 만물을 사사로움 없이 공평하게 보아 풀로 엮은 개처럼 좋아하지도 싫어하지도 않는다. 사사롭지 않았기에 스스로 오롯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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