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획연재: 청년, 춘천의 노포를 만나다] ④ 48년 전통의 '박제남테일러'
기획연재: 청년, 춘천의 노포를 만나다] ④ 48년 전통의 '박제남테일러'
  • 한진영 (‘사락락한복’ 대표)
  • 승인 2020.01.13 00:0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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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흔넷에 대한민국 양복명장에 오른 박제남 대표
"훈장을 가슴에 다는 순간 눈물이 흘러났지요"

대한민국 양복명장이란 타이틀이 눈길을 확 사로잡는 ‘박제남테일러’. 둘둘 곱게 말려 옷장 가득 빼곡하게 채워진 원단이며, 패턴 제도와 재단을 위한 작업테이블, 그리고 좌우대칭이 마치 그림처럼 완벽해서 어느 한곳도 주름이 잡히지 않은 양복까지 작지만 알차게 채워진 공간. 옷을 만드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갖고 싶어 할 깔끔한 가게다. 그는 1991년 44살 나이에 대한민국 최연소 양복 명장 타이틀을 갖게 됐다. 맞춤양복의 황금기를 보내고, 쇠퇴하는 맞춤양복점의 분위기 전환을 위해 지금도 현대적인 트렌드의 양복패턴 연구를 멈추지 않고 있다. 

Q. 처음 양복제작에 입문하시게 된 계기가 궁금해요.

A. 1947년 춘천에서 6남매 중 다섯째로 태어났어요. 아버지는 6·25전쟁 때 비통하게 돌아가셨어요. 난리 통에 온 가족은 피란하랴, 하루하루 끼니 걱정하랴 어려움이 컸던 시절이죠. 어렵게 중학교는 마칠 수 있었지만, 결국 고등학교 1학년을 중퇴해야 했지요. 기술이라도 빨리 배워야겠다는 절박한 사정 속에 지인 분 소개로 양복 만드는 일을 하게 되었죠.

박제남 대표
박제남 대표

Q. 기술을 배우면서도 공부에 대한 꿈을 쉽게 저버리지는 못했을 것 같아요.

A. 1963년 춘천 동해양복점에 처음 입사했으니, 지금은 57년차네요. 골무를 손에 끼고 바늘을 잡고, 그렇게 일을 배워나간 지 보름 만에 가봉시침을 했어요. 기술을 배우는 과정은 이른 오전 시작돼 매일 밤 12시까지 이어졌습니다. 그러면서도 밀가루범벅 도시락 가방 속에 고등학교 과정 영어책을 넣어 다니며 향학의 불길을 접지 않았죠.

Q. 21살 때 벌써 전국대회 은메달을 수상하셨다고 들었어요. 그 의미는 정말 남달랐겠네요.

A. 5년 동안 일했던 양복점이 문을 닫게 되자 국제라사로 직장을 옮겼어요. 21살 때죠. 제2회 강원도기능경기대회에 출전, 25명 중에서 금메달을 받았어요. 그리고는 군 입대를 했어요. 그런데 전국기능경기대회 강원도 대표로 출전을 허락해 달라는 대한복장기술협회 춘천지부장님의 공문이 부대장님 앞으로 접수된 거예요. 어렵게 출전한 제5회 전국기능경기대회! 전국의 내로라하는 30여 명과 경쟁해서 강원도 촌놈, 그것도 육군 이등병이 은메달을 땄죠.

Q. 전국대회 수상 후엔 더욱 승승장구하셨겠네요?

A. 제대 후 몇 군데서 오라 했지만 내 가게를 갖고 싶었어요. 1973년, 60만원이라는 적은 돈으로 낙원동 골목 2층에 6평짜리 양복점을 개업했어요. 단골고객이 늘어 요선동 1층으로 점포를 옮겼고, 상호를 '금메달 양복점'이라 달았죠. 1978년 8월, 대한복장기술협회 신사복콘테스트에 출품한 작품이 우수상(당시 2위)을 받으면서 양복 잘 만드는 집으로 소문이 났지요.

운교동에 위치하고 있는 맞춤양복점 '박제남테일러'의 내부. 현재의 점포는 1973년에 세워진 '금메달양복점'의 후신격이다.
운교동에 위치하고 있는 맞춤양복점 '박제남테일러'의 내부. 현재의 점포는 1973년에 세워진 '금메달양복점'의 후신격이다.

Q. 한창 양복이 성업하던 시기에는 춘천에 얼마나 많은 양복점이 있었나요?

A. 지금은 사람들이 편한 옷을 많이 찾지만 성업하던 당시는 양복을 많이 입었어요. 춘천에만 70개가 넘는 양복점이 있었죠. 지금과 비교하면 격세지감이죠.

Q. 그때도 고객의 마음을 잡기 위한 경쟁이 치열했겠죠? 사장님만의 노하우가 있었다면?

A. 손님들의 주소와 직장 전화번호를 기록해두고 봄·가을로 지금의 전단지 같은 걸 제작해 발송했어요. 연말이면 달력을 만들어서 500~600여 통의 친필 편지와 함께 보냈죠. 고객들은 양복점을 다시 찾아 주셨어요. 감사의 전화나 편지가 오기도 했고.

Q. 양복점 일을 해오시면서 가장 보람된 순간은 언제였나요?

A. 한국복장기술협회 춘천지부 총무 시절, 후배들의 기술발전을 도왔어요. 전국기능경기대회와 기술세미나가 열리는 곳을 찾아다니며 변화하는 봉제기술을 보고 배워와 점포의 기능인들에게 전수했죠. 이런 일이 있던 중 1980년 강원도 기능경기대회 양복부문에서 후배가 첫 금메달을 따는 성과가 있었어요. 또 춘천 약사동에 있던 춘천교도소 청송제3감호소 양재강사로 위촉돼 40여 명의 감호생들에게 양복제작기술을 강의했죠. 그중 배우고자 하는 의욕이 넘치는 감호생을 점포로 데려와 가르쳤고, 강원도 기능대회에 나가도록 해 재소자로서는 처음으로 금메달을 수상하기도 했어요. 감호소가 청송으로 이전한 후엔 춘천교도소 재소자들에게 봉사활동을 펼쳤어요. 그들을 또 양복점의 견습공으로 입사시켰고, 강원도 기능경기대회 양복부문에 내보내 금메달도 땄습니다. 그 외 척추장애가 있던 견습생을 가르쳐 장애인기능경기대회에서 수상한 일도 있어요. 지금도 그 제자들이 보내온 편지를 볼 때면 가장 보람됨을 느끼죠.

Q. 대한민국 양복명장이란 자리는 쉽게 주어지지 않겠지요. 어떤 과정이 있었나요?

A. 저의 오랜 고객이죠. 산업인력공단 춘천사무소 박흥순 과장님께 1991년 명장선정 공문 내용을 안내 받고 내용들을 상세히 정리해 상공회의소에 제출했어요. 산업인력공단에서 치러진 면접시험에서 그간의 기술봉사활동 등에 대해 답변했죠. 몇 달 후 1991년 대한민국 섬유분야 양복직종 명장 선정 소식을 들었고 큰 행복감을 느꼈어요. 그때 44세로 대한민국 최연소 양복명장이라는 타이틀을 가지게 됐죠.

Q. 양복명장이 된 이후의 생활은 어떠셨나요?

A. 1991년 10월, 서울산업대 시상식장에서 명장증서와 명장휘장을 가슴에 달았고, 대통령님 초청으로 청와대에도 다녀왔어요. 다른 직종의 명장님들과 독일·프랑스를 여행하는 영광도 누렸고. 정말 바쁜 나날이었죠. TV와 라디오 방송 출연, <월간복장> 표지모델 작품 제작, 또한 전국 의상학과 특별강좌 강사로 위촉돼 대학생들에게 강의도 했어요. 강원도 기능경기대회 때마다 심사장, 운영위원 등으로 수십 차례 활동했지요. 물론 유명해졌다고 해서 자만하지 않았어요. 그동안 꾸준히 해왔던 봉사도 마찬가지죠. 지금도 전국 교도소 20여 곳에 양복기술을 배우고자 하는 재소자들이 필요로 하는 공구와 책자 등을 보내면서 작은 도움을 주고 있어요.

Q. 아무래도 영예의 대통령상인 대한민국산업포장을 받으셨던 때가 두고두고 기억에 남을 것 같은데요, 그때 어떠셨나요?

A. 대한민국 양복명장이 된 이후에도 꾸준히 명장전에 작품을 내면서 기술발전에 일조했어요. 2002년, 정부가 전국 명장들을 대상으로 공적을 평가해 선정하는 훈·포장제도가 있다는 걸 알고 준비했죠. 그해 11월, 과천시민회관 대강당에서 대통령님이 주시는 포장증과 훈장을 왼쪽 가슴에 다는 순간 행복의 눈물을 흘리고 말았지요. 강원도 촌놈이 이토록 큰 상을 받아도 되는지, 스스로 지난 삶을 돌아보는 시간이었어요.

Q. 사장님에게 양복을 만드는 일이란 어떤 의미인지요?

A. 팝뮤직의 제왕으로 찬사 받았던 프랭크 시나트라의 ‘My way’를 아시죠? ‘남자는 느낀 대로 다 말해서는 안 되고, 레코드판을 뒤집어 놓듯 행동해서도 안 된다’는 가사가 나와요. 이 노랫말처럼 나는 험하고 힘든 세월을 쓰러질 때마다 일어서며 열심히 살아왔다고 믿어요. 내가 걸어온 양복장이의 길에 후회는 없습니다.

‘사락락한복’ 한진영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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