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회변혁에 헌신한 삶, 하광윤 씨

1980년대 강원대학교(현 후문)에 있던 사회과학 전문서점 ‘춘천서림’은 민주항쟁에 앞장선 이들의 사랑방이었다. 사랑방의 주인장은 3년차에 대학을 그만두고 고향으로 내려온 서울대학교 80학번 하광윤 씨. 현재 그는 강원민주재단 민주시민교육위원장으로 활동하면서 국가폭력에 저항하고, 사회변혁에 헌신하는 삶의 면모를 지키고 다지고 실천하고 있다. 그 하나가 춘천 보안사 터 ‘민주평화공원’ 조성이다. 그를 강원민주재단에서 만났다.

대학 선배들의 토론배틀, 그리고 비상계엄확대로 내려진 휴교령

그는 말한다. 1980년 서울대 자연과학대 입학하면서 주입식 제도교육에서 벗어나 심오한 논제를 두고 펼치는 열띤 토론형 수업을 기대했다. 하지만 대학의 현실도 시대를 반영하듯 고등학교와 별반 다를 바 없었다. 적잖이 실망했다. 그러한 실망을 희망의 끈으로 이어 준 건, 당시 교내 아크로폴리스라 불리는 계단광장에서 밤늦도록 열린 ‘시국토론회’였다. 김부겸·유시민 등 시국에 대한 선배들의 깊은 고뇌가 논리정연한 토론으로 이어지는 지식의 향연이었다. 친일파에 의한 건국, 민족지도자임을 자처하던 박정희의 친일행각, 노동자·농민·도시빈민 등의 수탈 속에 이룬 경제성장 등등. 채 성인이 되지 않은 열아홉 ‘하광윤’에겐 모든 것이 새로움이자 각성이었다.

선배들의 토론에 흥취를 갖던 대학생활도 잠시, 1980년 5월 18일 비상계엄확대와 함께 무자비한 탄압이 전국을 휩쓸었다. 당시 춘천에 머물러 5·18 현장을 직접 겪을 수 없었지만, 믿어지지 않는 국민을 향한 국가의 폭력을 간접적으로 접했다. 전남 순천 출신의 룸메이트는 이날 몸과 마음을 다쳐 영영 학교로 돌아오지 못했다.

그렇게 휴교령이 내려진 1980년 1학년의 여름과 가을은 춘천에서 친구, 선배들과 보냈다. 너무나도 무기력하고 잔인한 여름이었다. 가을이 오면서 무기력을 떨치고 다시 책을 접하면서, 민주주의를 지향하던 막연한 생각을 넘어 혁명에 복무하는 삶을 살겠다고 다짐했다. 

집시법으로 구속, 왕복 10시간 거리를 매일 찾아와 격려해 주시던 어머니

그렇게 여름과 가을을 보내고 학교로 돌아왔다. 하지만 누구도 5·18 이야기를 꺼내지 않았다. 뜨겁던 토론장도 적막했다. 그 많던 사람들과 토론들은 어디로 갔는가. 학교는 무의미했다. 사회변혁운동에 투신하고자 하는 열망만이 온몸을 전율케 했다.

1981년 3월, 광주항쟁 이후 교내에서 첫 시위가 벌어졌다. 즉각 대열에 합류해 침묵하는 세상을 향해 돌멩이를 던졌다. 와중에 사복경찰의 무자비한 구타와 함께 체포·연행되어, 6월 말 집행유예로 풀려나기 전까지 100일을 구치소에서 보냈다.

이때 가장 가슴 먹먹하게 만든 이는 어머님이다. 오가는 거리만도 10시간인데, 하루 빠짐없이 아들을 보러 오셨다. 힘든 걸음에도 어머님은 낙담과 책망 대신 위로와 격려로 아들을 껴안았다.

어린 시절 넉넉지 않은 형편에 아버지마저 어느 순간 일을 놓으셨고, 시동생들이 딸린 대식구를 책임지시던 어머님이셨다. YMCA라는 단체에서 오랫동안 봉사하신, 온화하시고 강하며 겸손한 분이셨다. 어머님은 종종 “어려운 사람을 돕는 사람이 되라”며 당신의 바람을 말씀하곤 하셨다.

그렇게 담담한 어머님이라 해도 고생 끝에 키운 아들의 푸른 수의를 대하는 심정은 어떠했을지…. 말문이 막히는 대목이다.

민주화 열망에 가득찬 학생들의 사랑방 ‘춘천서림’ 

그렇게 학교에서 제적됐다. 이후 1983년 복학조치로 재등록했지만 마음은 이미 학교를 떠나 있었다.

고민 끝에 사회과학 전문서점 ‘춘천서림’을 강원대학교 입구에 열었고, 많은 학생들의 사랑방이 됐다. 이곳을 통해 평생을 함께할 동지인 최윤·황기면·천남수·윤용병·이진기·전재원 등 사람을 만나고 얻었다.

1987년 춘천의 6월항쟁. 많은 시민들이 거리로 나와 시위에 합세했다. 하지만 당시는 학생·시민들의 민주화 요구를 현실화할 수 있는 정치세력이나 플랜이 없었다. 자연스레 정치세력화에 대한 요구들이 나왔다. 그러한 세력화를 위한 활동에 참여했고, 그해 12월 대통령선거법 위반으로 구속돼 첫아이 돌잔치를 검사실에서 가졌다.

이후 민통련, 민중의당 등 진보정당 활동을 했다. 하지만 선거 패배와 함께 정당을 통한 정치세력화에 한계를 느끼고, 시민사회 등 다양한 영역으로 눈을 돌려 춘천경실련 초대 사무국장을 지내기도 했다.

그간 많은 일들이 있었다. 2002년 이후 자녀교육 문제로 서울에서 지내다 대장암 말기라는 병을 얻어 2018년부터 1년간 투병생활을 했다. 건강을 회복하고 지난해 5월 강원민주재단에 합류했다. 

강원민주재단 활동, 그리고 올해 가장 큰 숙원과제 “보안사 터에 민주평화공원을!”

강원민주재단 활동은 기쁨 그 자체였다. 옛날이라면 옛날, 경찰에 쫓기며 사비 털어 유인물 만들던 때가 엊그제 같은데, 자치단체의 지원을 받아 민주화운동을 기념하고 기록한다는 사실만으로도 행복하고 뿌듯했다. 2020년은 코로나19로 사회 전반이 침체됐지만 강원민주재단에서는 민주시민교육을 진행했고, 민주화운동 경험담을 공모해 수기집도 만들었다. 또한 춘천·원주·광산지역 등 3곳의 민주화운동 지도를 펴냈다.

그에게는 올해 반드시 해야 할 일이 하나 있다. 시대에 자유롭지 못한 당대의 사람들을 떠올리며 인터뷰에 응한다는 것이 얼마나 과분하고 죄스러운 일인가 하는 생각도 떠올랐지만, 그가 자신의 이야기를 펼쳐 낸 것은 오직 한 가지다. 춘천 보안사 터에 ‘민주평화공원’이 세워져야 한다는 강박적 간절함이다.

춘천 보안대는 군사정부, 문민정부 이전 시절 국가폭력의 최일선에서 불법구금·고문을 자행한 곳이다. 5·18 당시 춘천지역에서도 약 100여 명의 학생과 민주인사들이 형용할 수 없는 고통을 당했다.

그가 고집하는 보안사 터 ‘민주평화공원’ 설립은 당시의 만행을 응징하고자 함이 아니다. 여전히 그때 그 기억에 뒤척이며 눈물 흘리는 친구를 위로하고 치유하기 위해서다. 국가폭력을 경계하고 민주주의 소중함을 일깨우는 ‘기억의 공간’으로 기리기 위해서다.

춘천시는 그 악몽의 장소를 현재 ‘소공원’으로 조성할 계획을 세웠다. 하지만 ‘문화공원’으로 재지정만 한다면 보안대장 관사를 존치시키는 등 민주평화기념관으로 기능을 할 수는 법적 토대도 있다. 그 연장선에서 그는 5월 초 “보안사 터에 민주평화공원을!”이라는 제하의 ‘기억과 다짐을 위한 춘천시민 100인 제안’을 준비중이다.

보안사 문제는 ‘국가폭력’ 문제다. 제주 4·3항쟁이나 1970~80년대 군사독재와 같은 폭력은 발생하고 있지 않지만, 용산참사나 세월호참사 등 자본과 권력유착에 의한 폭력은 아직도 진행중이며 크고 작은 사건·사고를 낳고 있다. 폭력에 무감각한 우리가 되지 않기 위해 ‘민주평화공원’ 설립을 적극 추진한다는 다짐이다.

유은숙 시민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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