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현정 (시인)

 “은혜라고 했느냐, 사랑이라고 했느냐, 이제 보니 그 은혜가, 사랑이, 너를 공부로부터 멀리하게 했구나. 그 은혜와 사랑이, 너의 발길을 매즙장과 마상과 망건장과 갖바치와 역관과 화원에게로, 들과 산으로, 절간으로, 색주가로 가게 하였구나, 세상에 귀하고 천한 사람이 없음을 일러주었던 내 말이 너를 색욕의 구덩이로 밀어 넣고, 천박한 짓을 용납하도록 만들었구나. 그렇다면 그것을 어찌 은혜라, 사랑이라 말할 수 있느냐, 네 입으로 그렇게 말하였으니 너는 그것을 은혜와 사랑의 보답이라 할 테지. 허나, 미안하구나. 나는, 아니다. 나는 그렇다 할 수 없다. 남녀가 벗고 뒹구는 것을 그려놓고 사랑을 말한다면, 흙탕으로 뒤덮인 황하를 산정의 샘물이라 하는 것과 무엇이 다르단 말이냐, 흙탕의 물과 샘의 물을 구별하지 않는다면 맑은 물로 갓끈을 씻고, 흐린 물로 발을 씻는 걸 구별할 필요가 어디 있으며, 고결과 오염의 차이를 논하는 것이 무슨 소용…….”

하창수의 <사랑을 그리다>. 상현의 춘화첩인 춘풍취생동첩(春風吹生動帖)을 던지며 백부 김자청이 일갈하며 이별을 고하는 장면. “네가 모습을 보이지 않은 한 달이 내게는 십 년과도 같았다. 이제 더 이상 너의 부재를 견딜 수 없으니, 다시는 내 눈에 보이지 말라.” 자식보다 더 아끼는 조카를 포기하는 그의 참담한 목소리가 생생히 들리는 듯하다. 김자청의 사랑이 상현의 사랑 이상으로 절절하게 다가오는 건 사랑이 지는 자리에 숱하게 앉아 본, 싱싱한 삶의 순간들이 아직 내 안에 남아있기 때문일까. 아, 어쨌든 이 이별의 대사는 어느 날 갑자기 사라진 당신에게 날렸어야 했다. 

  이별. 처음엔 근심과 걱정이 전부였다. 떠난 게 아니라고, 무슨 사정이 생긴 거라고, 반드시 돌아올 거라고 나를 다독였다. 몇 번의 전화를 했다. 받지 않았다. 두 주쯤 지나자 화가 치밀어 올랐다. 나를 발톱의 때만큼도 생각 안하는구나. 이기적인 사람! 이럴 거면 내 앞에 나타나지나 말지. 삼 주가 지나자 당신의 그 환한 미소와 다정한 목소리가 너무도 그리웠다. 이유를 물은들 뭐가 달라지겠느냐만 이유라도 묻고 싶었다. 오랜 시간이 지나서야 비로소 나를 돌아보는 시간이 왔다. 한심하고 어리석었던 내가 보였다. 밥알이 목구멍을 넘지 못했다. 자존감은 바닥을 쳤고 망가지는 삶을 속수무책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 결국 포기의 순간을 받아들였다. 패배감을 곁들인. 한 계절이 지나고 전화가 왔다. 당신이 아무 일 없는 듯 물었다. 무슨 일 있었어?

작가의 소설은 초반을 단숨에 읽지 않으면 처음부터 다시 펼쳐야 한다. 이 소설 역시 세 번의 고비를 넘겼다. 나름 등장인물과 관계도를 머릿속에 그리며 읽었지만 같은 인물에 이름과 호가 번갈아 나오니 급기야 따로 노트를 해가며 읽기에 이르렀다. 꽤 유효했다. 작가의 방대한 지식과 깨달음의 경지, 환생을 했대도 믿을 것 같은 한시(漢詩)의 향연, 유려한 문장들……. ‘행간에 감춰진 작자의 진의를 캐내는 게 진짜 독서’라면 나는 이 독서의 반은 실패했는지도 모른다. 작가의 문장은 음란마저 아름답게 품어 안는다. 라고 메모한 후 소설을 덮었다. 작품을 접할 때마다 드는 생각이지만 작가는 소설에서 말하는 ‘몰두의 천재’가 아닐까 싶다.

 

 

저작권자 © 《춘천사람들》 - 춘천시민의 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