탁운순 (강원이주여성상담소장)

 “리차드 로티(Richard Rorty)는 타문화와의 이해와 연대성으로 ‘낯선 사람들을 고통받는 동료로 볼 수 있는 상상력에 의해 성취될 수 있는 어떤 것’으로 낯선 사람들이 어떠한지에 대한 상세한 서술과 우리 자신들은 어떠한지에 대한 재서술이 필요하다고 했다. 따라서 낯선 사람들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오랜 기간 최대한 문화상대주의적 태도로 자신의 ‘문(文)’이 힘을 발휘하는 것에 저항하면서, 판단을 중지할 것과 낯선 타인의 얼굴이 요구하는 명령을 받아 안음으로써 자신을 변화시키고 사회를 변화시킬 수 있다.(서덕희, 2011)”  

갑자기 추워졌다. 밖으로 나가려다 다시 돌아와 외투를 껴입는다. 두툼한 외투에 팔을 넣으며 태어나 50년을 살아온 땅에서도 매년 맞는 겨울이 낯설다는 데 생각이 멈췄다. 오늘 만나는 h는 베트남에서 이주한 지 18년이 되었다. 그녀의 겨울은 어떨 것인가. 

오늘 만나는 h는 공익재단에서 공모한 사업에 선정되어 방송국 기자와 인터뷰를 하는 중이다. 기자가 먼저 와서 인터뷰를 진행하고 있었다. 단출하고 깨끗하게 정리된 집, 평소 누구에게도 폐를 끼치지 않으려고 애쓰는 단정한 h의 이미지 그대로였다. h는 술만 먹으면 폭력을 행사하는 남편과 8년 전에 이혼하고 두 아들을 홀로 양육하던 중 유방암이 발견되었다. 의사는 생존 기간을 5년이라고 보았다. 암 진단을 받고 돌아서는 데 제일 먼저 고향에서 떠나올 때의 자기 모습이 생각났다고 했다. 호찌민시에서도 10시간을 더 가야 하는 시골 마을, 아버지는 어부였고 정신이 온전하지 못한 엄마는 늘 집에 없었다. 4녀 1남 중 셋째로 태어났지만 초등학교도 가지 못했다. 온 가족이 24시간 일해도 가정생활은 나아지는 게 없었다. 열네 살에 큰언니가 다니던 호찌민시의 공장에 같이 다녔다. 그리고 신문·텔레비전에서 한국의 산업 기술 발전을 보며 동경하던 중, 국제결혼을 통해 남편을 만났다. 남편은 착했지만 무능했고, 시어머니와 시누는 남편을 통해 h의 가정생활을 조종했다. 아기가 태어났지만, 분유 한 통 기저귀 하나도 제 손으로 살 수 없었다. 모든 생필품은 시어머니와 시누가 사갖고 왔다. 외국 아내가 밖으로 나돌면 바람이 난다고 굳게 믿는 시댁과 남편으로부터 h는 아이 둘을 낳고 이혼을 한 이후에야 밖으로 나올 수 있었다. 이혼 후 h는 공장에 다니며 아이 둘을 양육했고, 다행히 아이들은 공부를 잘했다. 그 당시 다섯 살, 네 살이던 아들이 지금은 고등학생이 되었다. h의 암 발병 소식을 들은 남편이 집에 찾아와 “나랑 좀 더 참고 같이 살지 그랬냐. 함께 살았으면 암에 안 걸렸을 것 같다”며 울었다. 그 말을 하며 h가 웃었다. 

“아마 그때 같이 살았으면 진즉에 죽었을걸요. 그걸 모르더라고요. 내가 얼마나 힘들었는지.” 

기자가 마지막으로 할 이야기가 있으면 하라고 했다. 

“암이라고 해서 무섭지는 않아요. 단지 남아있는 아이들이 걱정될 뿐이에요. 근데 큰아이가 그래요. 엄마 걱정하지 마. 엄마가 오래 산다면 더 좋겠지만 그렇지 않아도 괜찮아. 우리 하루하루 의미 있게 살아. 엄마가 걱정 없이 사는 게 내 소원이야. 동생은 내가 잘 돌볼 게 라고 말하더라고요.”

h는 시계를 보더니 출근을 해야 한다며 모자를 챙겼다. 그녀는 항암치료 중에도 하루 다섯 시간씩 식당 아르바이트를 하여 생활비를 충당한다. 

인터뷰를 끝내고 돌아오는 길이 어둡다. 오늘 만난 h의 소망과 나의 소망이 다르지 않음을 알았다. 만약 내게 앞으로 남은 기간이 정해진 순간이 온다면 나 또한 가장 먼저 아이들에 대한 염려가 떠오를 것이다. 더 이상 h는 내게 낯선 이방인이 아니다. 오늘 나는 낯선 사람들이 어떠한지에 대한 서술과 더불어 나 자신은 어떠한지에 대한 재서술에 단초를 마련했다.

탁운순 (강원이주여성상담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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