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철호(강원대 명예교수, 한국메밀연구소장)

 춘천은 막국수의 고장이다. 그런데 동서남북 춘천의 관문 어디에도 춘천이 막국수의 고장이란 간판이 보이지 않는다. 봉평에 들어서면 마을 입구에 ‘메밀의 고장’이란 큰 간판이 있다. 일본 도야마 역(驛)에는 ‘약(藥)의 도시’라는 간판이 있다. 전통적으로 일본의 생약으로 유명한 도시의 특성을 잘 나타낸 것이다. 

막국수! 관문에 ‘막국수 고장’을 나타내는 대형간판이나 조형물 하나 없어도 춘천사람들의 마음속에 뚜렷이 새겨진 이름이다. 사는 지역에 전국적인 지명도가 있는 특산음식이 있다는 것은 자랑할 만한 일이다. 하루아침에 뚝딱 만들어지는 명성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만큼 춘천은 막국수로 인해 복 받은 도시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 같다. 

주변에서 막국수의 원료인 메밀을 볼 수 없다는 것은 간판이 없는 것보다 더 큰 아쉬움이다. 그런 상황에서 《춘천사람들》이 귀한 지면에 ‘메밀밭’을 만들어 주어 고맙기 그지없다. 이 지역에 50년 넘게 살면서 공부도 하고, 대학 교단에서 연구하고 가르치면서 ‘메밀’과 ‘막국수’를 과학과 문학으로 ‘벗’할 수 있었던 것은 개인적으로도 큰 행운과 영예가 아닐 수 없다. 그렇게 이 지역에 진 마음의 빚을 ‘지상(紙上) 메밀밭’에 풀어 볼 수 있게 된 것이다. 그동안 공부하고 연구한 메밀에 관한 지식과 정보를 알기 쉽게 풀어 소개하려고 한다. 이미 ‘메밀TV’ 유튜브를 통해 많은 정보를 소개해 왔으나 지면의 장점을 살려 메밀꽃을 피워 볼 생각이다. 독자들도 이 ‘지상 메밀밭’에서 꽃을 즐기고 씨를 수확하는 ‘메밀 농심’을 이심전심 공유할 수 있기를 소망한다, 

내가 본격적으로 막국수에 입문하여 제대로 맛을 들이게 된 것은 제대 후 대학원에 복학해 학교에 상주하면서부터다. 가끔 실험이 끝나면 교수님께서 학생들을 데리고 막국수집을 찾으셨다. 횟수가 잦아지면서 비로소 막국수의 참맛을 느끼게 되었고 국수 삶은 면수도 즐겨 마시게 되었다. 교수님으로부터 막국수를 맛있게 먹는 요령과 메밀의 효능 및 막국수 제조에 관한 여러 가지 재미있는 설명을 들으면서 체험의 깊이가 더해지는 가운데 차츰 막국수의 진가에 매료되기 시작했다. 막국수뿐만 아니라 그 원료인 메밀에까지 무한한 애정을 느끼는 애호가가 되었다. 게다가 한 걸음 더 나아가 메밀을 연구하고 막국수의 식문화적 전통을 잇는 데 일조하고 싶은 마음에서 이런저런 메밀 관련 활동을 해왔다. 

강원도 사람으로서 강원도를 대표할 만한 작물인 메밀과 메밀 식품에 대해 미력하나마 학술적으로 뒷받침하게 된 것이 큰 행운이고 보람으로 생각되었다. 1996년 11월 29일 ‘한국메밀연구회’를 창립하고 2001년 제8회 세계메밀학회를 춘천에 유치했다. 비록 시작은 미미하였지만 ‘메밀의 과학과 문화의 진흥’을 모토로 열심히 노력하면서 적어도 ‘메밀에 대해 아무것도 하지 않은 것보다는 낫다’는 것을 느꼈다. 하지만 아직도 갈 길은 멀고 할 일은 많다.

한 마디로 ‘메밀’은 보곡(寶穀)이다. 메밀은 건강 음식의 재료로서 조금도 손색이 없고 정서적으로도 어느 식물보다도 강한 친밀감을 주는 ‘정감 넘치는 작물’이다. 이제부터 과학과 문학을 도구 삼아 이 ‘지상 메밀밭’에 메밀을 뿌리고 가꾸며 메밀 농사를 지어보려고 한다. ‘메밀’이라는 원석에서 갖가지 ‘보석’이 만들어지는 과정이기도 할 것이다. 다른 작물에 비해 그다지 소출과 소득이 높지 않고 기계화도 덜 되어 농사짓기 힘들다는 이유에서 메밀이 여전히 ‘소홀한 작물(minor crop)’에서 크게 벗어나고 있지 못하나 메밀의 가치는 그렇게 소홀할 수 없는 것임을 알게 될 것이다. 더 많은 소득과 재화를 좇아 분망하고 각박한 인심을 이 메밀밭에 잠시 내려놓고 우리가 미처 몰랐던 메밀의 우수한 가치에 심취해 보는, 소중한 계기가 되기를 기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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