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유정문학촌, 개관 20주년 기념 회화 〈유정고도〉공개
신대엽 화가, 7m 길이 8폭에 삶의 주요 장면 담아
삶과 문학 알리는 순회전 후 김유정기념전시관에 안착

김유정의 외롭고 고단했던 스물아홉 짧은 삶의 여정이 회화로 탄생했다.

김유정문학촌(촌장 이순원)이 문학촌 개관 20주년을 맞아 김유정의 삶을 다룬 회화 작품 〈유정고도 裕貞孤道〉를 제작하고, 순회전을 연다. 신대엽 화가가 고증에 심혈을 기울이며 제작한 〈유정고도〉는 실레마을에서 보냈던 어린 시절부터, 서울에서 보낸 학창시절 그리고 죽음에 이르기까지 김유정의 삶에 큰 영향을 주었던 장면들이 7m에 이르는 8폭 대작에 담겼다. 이해를 돕기 위해 각 그림에 담긴 유정의 삶을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1폭 : 말더듬이 멱서리 - 대갓집 도련님으로 태어나다

김유정의 부모는 딸만 다섯을 낳은 끝에 얻은 귀한 아들이 부유하고 건강하게 장수하기를 바라는 마음에 ‘멱서리(곡식을 담는 그릇)’라는 아명을 지어 주었지만, 유정은 말더듬이에다 허약했다. 아버지는 횟배를 자주 앓는 유정에게 담배를 피우게 했다. 당시에는 담배가 회충을 죽인다는 속설이 팽배했다. 이렇게 시작된 어린 시절의 흡연은 후일 김유정이 골초가 되고 폐결핵을 앓는 원인이 됐다. 어린 유정이 담배를 피우는 모습은 집안과 마을 사람들의 불편한 관심을 불러일으키고 이 때문에 감수성이 예민한 유정은 사람들 앞에 나서기를 꺼리는 염인증(厭人症)이 싹트기 시작한다. 

신대엽 화가가 그린 8폭 대작 〈유정고도 裕貞孤道〉에 김유정 삶의 주요 장면들(오른쪽부터 순서대로)이 담겼다.    제공=김유정문학촌

2폭 : 유년의 상실과 슬픔 - 청춘과 행복은 아버지의 상여를 따라 멀어져 갔다

부모님의 무한한 사랑을 받으며 자라는 김유정은 여섯 살 무렵 서울 종로구 운니동에 있는 아흔아홉 칸 집으로 이사를 한다. 하지만 일곱 살 되던 해 어머니가 사망하고 슬픔을 치유할 틈도 없이 아버지마저 병으로 급격히 쇠약해진다. 그 후 가세는 점점 기울어 운니동에서 관철동으로 다시 숭인동·관훈동·청진동으로 살림을 줄여가야 했다. 이 시기 김유정은 글방을 다니며 4년 동안 천자문·통감 등 한문 공부와 붓글씨를 익히고 12세 되던 1920년 재동공립보통학교에 입학한다.

3폭 : 예술과 우정 - 조선의 톨스토이를 꿈꾸다

재동공립보통학교를 졸업하고 휘문고등보통학교에 입학한 김유정은 평생의 친구 소설가 안회남(1907~?)을 만난다. 안회남은 신소설 《금수회의록》의 작가 안국선(1878~1926)의 아들로 1931년 조선일보 신춘문예에 《발》로 등단한 월북 작가이다. 문학적인 분위기에서 다복하게 자란 안회남은 김유정에게 선망의 대상이자 의지처였다. 둘의 우정은 문학에 대한 열정으로 깊이를 더해 갔다. 톨스토이와 도스토옙스키, 체호프, 노신 등의 작품을 탐독하고 찰리 채플린 영화, 다양한 스포츠와 바이올린, 하모니카 연주를 즐겼다.

4폭 : 방황과 습작 - 불행한 삶, 문학의 자양분이 되다

김유정은 1933년 서울동양극장에서 열린 조선성악연구회 창립공연에서 춘향역을 맡은 명창 박녹주(1905~1979)의 동편제 소리에 큰 감동을 받는다. 돌아가신 어머니의 모습을 떠올린 그는 헤어나기 힘든 사랑에 빠진다. 이 무렵 연희전문과 보성전문학교를 중도에 그만두고 실레마을에 머무른다. 유정의 나이 22세였다. 어린 나이에 부모를 잃고, 급격한 경제적 몰락과 실연의 아픔을 겪으며 몸과 마음이 피폐해진 채로 고향에 내려온 그는 힘겹게 살아가는 기층민들의 삶을 목도한다. 개인적인 불행과 시대의 불운은 유정에게 하나의 화두가 되고, 그의 문학적 자양분이 되어 서글픈 웃음을 주는 해학의 문학으로 자리 잡는다. 자전적 소설 《심청》을 첫 작품으로 탈고하면서, 본격적으로 작품을 쓰기 시작한다. 

5폭 : 귀향과 농촌계몽운동 - 고향 실레마을에서 소설의 토양을 다지다 

김유정은 실레마을에서 야학당을 열고 농우회, 노인회, 부인회를 조직하는 등 농촌계몽운동을 펼친다. 야학당은 후에 간이학교로 인가받아 ‘금병의숙’이 됐다. 이 시기 김유정은 충청도 예산에 있는 광업소의 현장감독으로 몇 달간 머무르며 광부, 잠채꾼(광물을 몰래 채굴·채취하는 사람) 등 막장에 내몰린 인생들을 만난다. 그 경험은 후에 금을 소재로 한 작품들을 낳는다. 

6폭 : 화양연화(花樣年華) - 문학은 꽃피고, 생명은 이울다

몇 해간 습작기를 보내던 김유정은 1933년 종합잡지 《제일선》에 《산골 나그네》를 발표하며 문단에 발을 들인다. 《제일선》과 《개벽》의 발행인인 춘천 출신 차상찬(1887~1946)은 일찌감치 그의 문학성을 알아보고 흔쾌히 실어주었다. 이후 1935년 《소낙비》로 조선일보 신춘문예 1등, 《노다지》로 조선중앙일보 신춘문예 가작 당선이 이어졌다. 이 해 《금 따는 콩밭》, 《금》, 《떡》, 《만무방》, 《산골》, 《솥》, 《봄·봄》 등 한 해 동안 열한 작품을 발표했다.

조선일보 신춘문예 1등 당선 축하연에서 천재 작가 이상(1910~1937)을 만나며 우정을 나눈다. 이어 박태원(1909~1986), 이태준(1904~?), 정지용(1902~1950) 등이 속한 순수문학을 추구하는 ‘구인회’ 일원으로 활동하며 문우의 폭을 넓힌다. 유정의 생애에서 꽃이 만발하듯 가장 화려한 시기였으나 폐결핵이 그의 육신을 갉아먹고 있었다. 

순회전에서 함께 소개되는 〈김유정의 사람들〉(신대엽 作)  제공=김유정문학촌

7폭 : 겸허 - 다만 문학의 길을 걷고 싶었다 

김유정은 쉬지 않고 글을 썼다. 소설을 쓰기 위한 건강을 회복하려면 약이 필요했기에 원고료를 받고자 쉼 없이 소설을 썼다. 그러나 소설 쓰기는 그의 몸을 더욱 망가뜨렸다. 그럼에도 동반 자살을 제의했던 이상에게 앙상한 가슴을 풀어헤치며 “명일의 희망이 이글이글 끓습니다”라며 삶의 의지를 강하게 표현했고, ‘겸허’라는 두 글자를 머리맡에 붙이고 오로지 창작에 몰두했다. 

유정은 요양을 위해 1936년 정릉의 한 암자로, 다시 그해 겨울 형수의 집으로 거처를 옮긴 후 《심청》, 《봄과 따라지》, 《가을》, 《동백꽃》 등 작품 12편을 발표했다. 

8폭 : 영원한 청년작가 - 한평생의 햇빛과 굳게 작별하다

1937년 2월 김유정은 조카의 부축을 받아 경기도 하남 다섯째 누이의 과수원 토방으로 거처를 옮기고, 검은 천으로 창문을 가린 채, 적막한 어둠 속에서 병마와 처절한 싸움을 벌였다.

유정은 실낱같은 희망을 버리지 않고 기력을 다해 《따라지》, 《땡볕》, 《연기》 등을 발표했다. 하지만 유정은 동백꽃(생강나무 꽃)이 피는 봄날 외롭고 고단한 삶을 뒤로한 채, 1937년 3월 29일 오전 6시 30분 한평생의 햇빛과 굳게 작별한다. 스물아홉 고단한 삶은 뼛가루가 되어 한강에 뿌려졌다.

김유정문학촌은 〈유정고도 裕貞孤道〉를 가지고 9월 4일까지 하남문화예술회관에서 순회전 ‘유정고도(裕貞孤道) - 실레에서 산곡까지’를 개최한다. 이번 전시에는 지난해 신대엽 화가가 그린 〈김유정의 사람들〉도 함께 소개된다. 

김유정문학촌은 김유정이 생의 마지막 순간을 보낸 하남 순회전을 통해 김유정의 삶과 문학을 더 많은 사람에게 알릴 수 있을 것으로 기대한다. 박지영 김유정문학촌 사무국장은 “김유정의 삶의 궤적을 밟아 보자는 의미에서 순회전을 기획했다. 김유정 선생님이 춘천에서 태어나셨지만 서울에서 주로 사셨고 돌아가실 때는 하남에서 돌아가셨다. 그래서 춘천에서 시작돼서 서울과 하남을 잇는 그런 유정고도, 김유정의 외로운 길이라는 뜻으로 전시회를 준비했다”라고 말했다. 이순원 김유정문학촌장은 “김유정 선생님은 춘천을 대표하는 작가를 넘어 전 국민에게 사랑받는 작가인 만큼 이번 전시가 문학촌과 춘천을 알리는 데 큰 역할을 해줄 것으로 기대하고 있다”라고 말했다.

〈유정고도 裕貞孤道〉와 〈김유정의 사람들〉은 하남 전시 후 김유정문학촌으로 돌아와 10월 김유정문학촌에서 시민에게 소개되며, 리모델링 후 다시 여는 김유정기념전시관에 안착할 예정이다. 한편, 김유정문학촌은 개관 20주년을 맞아 김유정문학촌 20년사 발간, 문학촌 소장 도서 무료 배포, 대한민국 문인 아카이브 구축사업, 김유정의 흔적을 찾고 알리는 표징(表徵)사업 등 다양한 사업을 진행하고 있다.

박종일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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