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문서를 통해 본 춘천 호구와 신분 및 부의 변화 양상
명문과 호구단자를 중심으로

명문

명문이란

사람이 모여 함께 살아가면서 집을 짓고 농사지을 땅이 필요하다. 농경을 기반으로 했던 시대에는 땅이 더더욱 중요한 가치를 지닐 수밖에 없을 것이다. 땅에 대한 개인의 소유권이 인정되면서 그 땅에 대한 권리나 자격, 사실 따위를 증명하거나 명백하게 확증하는 문서가 명문(明文)이다.

명문의 가치 

왼쪽부터 단자 1822년 戶口單子 壬午式戶口單安(1822년) 東面 沙器村 幼學李達培, 명문 1880년 明文 光緖六年(1880년)二月日柳進士宅奴福南前明文 南山外 楸谷面 柳垈谷里 건 사본  

명문에는 시기별 지가(地價)의 변화 추이와 매매 요인이나 그 동향을 살필 수 있을 뿐만 아니라, 대다수 매매 문건이 사노(私奴)에게 집중적으로 토지 매매가 이루어지고 있다는 점에서 신분 변동이나 부(富)의 재분배 과정을 살펴볼 수 있다.     

춘천 관련 명문 자료 분석 

토지 매매 명문과 관련한 42건은 한 건을 제외하고 춘천의 남면과 남산면 지역에 몰려 있는 특징을 보인다. 춘천지역 토지 매매 문건은 1708년에서 1916년까지 208년간에 걸친 시기에 작성되었다. 춘천 남면 사동리(寺洞, 일명 절골, 현 가정3리) 지역 관련 문건이 20건으로 전체의 절반가량을 차지하고 남산면 추곡(楸谷, 일명 가래울, 현 추곡리와 발산리) 지역 관련 문건이 13건으로 다음을 차지한다.

 추곡리(현 발산리) 유텃골[柳垈谷]은 8건으로 가장 많은 거래가 이루어졌다. 거래가 1832년(3건) 1848년 1849년 1880년 1882년 1897년에 이루어졌으며, 토지거래를 통해 이루어진 소유자를 열거하면 다음과 같다.

1) 道光十二年(1832년) 幼學洪益憲前明文

2) 道光十二年(1832년) 黃奴萬卜前明文 (去來價 30냥)

3) 道光十二年(1832년) 黃奴萬卜前明文 (去來價 6냥)

4) 道光二十八年(1848년) 高光旭前明文

5) 道光二十九年(1849년) 黃奴金乭前明文

6) 光緖六年(1880년) 柳進士宅奴福南前明文

7) 光緖捌年(1882년) 金奴小汝山前明文

8) 大韓光武一年(1897년) 金奴順伊前明文

1) 유학(幼學) 홍익헌(洪益憲)이 1832년 토지거래를 통해 유학(幼學) 정달원(鄭達源)에게 6냥에 구매(購買)하여서, 3) 같은 해 황노(黃奴) 만복(萬卜)에게 6냥에 되판다. 4) 1848년 평민으로 보이는 고광욱(高光旭)에게 전주(田主) 노(奴) 양이(良伊)가 15냥에 팔고, 5) 이듬해인 1849년 증인 겸 집필자 김계원(金啓元)을 통해 황노 만복의 자식으로 보이는 황노(黃奴) 쇠돌[金乭]이 15냥에 매입한다. 6) 1880년 쇠돌이의 자식으로 보이는 황노 부성(夫成)이가 증인 겸 집필자 유노(柳奴) 계득(啓得)을 통해 유진사댁(柳進士宅) 노(奴) 복남(福男)에게 700냥에 판다. 7) 1882년 황노(黃奴) 만복(萬卜)이 1832년 유학 홍익헌으로부터 30냥에 구매한 토지를 황노(黃奴) 만복(萬卜)이 증인이고 이노(李奴) 귀복(貴卜)이 집필자가 되어서 김노(金奴) 소여산(小汝山)에게 60냥에 판다. 8) 1897년 황노(黃奴) 만복(萬卜)이 증인이고 이노(李奴) 천득(千得)이 집필자가 되어 전주(田主) 황노(黃奴) 말례(唜禮)의 땅을 김노 소여산의 딸로 보이는 김노(金奴) 순이(順伊)에게 1,200냥에 판다.

 명문 중 추곡리(현 발산리) 유텃골[柳垈谷] 지역을 대상으로 분석한 결과를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첫째, 양반이나 서민 소유지가 노비의 소유지로 이전하는 양상을 확인할 수 있다.

 둘째, 토지 매매의 증인이나 집필자가 양반 또는 평민에서 노비로 전환되고 있음이 확인된다. 노비가 증인과 문서 집필자로 등장하고 있음은 노비 혁파가 1800년대 초반부터 실제로 진행되어왔으며 나아가 노비의 신분적 위상이 1800년대 후반에 이르러서는 상당한 부분에 도달해 있음을 알 수 있다.

  셋째, 명문 여덟 건 가운데 5건에 등장하는 황노(黃奴) 만복(萬卜)이란 인물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노비의 신분으로 요즘 토지중개인에 해당하는 역할을 하고 있으며, 시간적 차이가 있기는 하지만 토지거래에 있어 이윤을 추구하는 인물임을 알 수 있다. 즉 만복은 노비에게 사유재산 획득을 통한 신분 상승과 사회적 지위를 끌어올린 본보기라고 할 수 있다. 

 

호구단자(戶口單子)란

호구단자는 지금의 인구주택총조사와 비슷한 성격을 지녔다고 할 수 있다. 다섯 가구를 하나의 통(統:큰 줄기)으로 하는 오가작통법(五家作統法)에 따라서 가구마다 작성한다. 가구가 작성한 단자를 관에서 살펴보고 적은 사항이 실제와 부합하는가를 확인하고 관인을 찍어 주는데 관인이 찍힌 호구를 준호구(準戶口)라고 한다. 호구단자에는 작성연도, 지역, 인적 사항(本人 父 祖 曾祖 外祖 妻 妻父 妻祖 妻曾祖 妻外祖 食率子女 食率奴婢) 등을 기록한다.

호구단자의 가치 

호구단자를 통해 특정 가문과 한정된 지역이기는 하지만 호구 실태를 살펴볼 수 있으며, 노비 혁파에 관심이 높아지고 그 혁파가 이루어지는 18~19세기 무렵의 호구단자를 통해 그 변화 양상을 알 수 있는 자료이다. 특정 지역의 인구수를 가늠할 수 있는 지표 자료가 되기도 한다.

춘천 관련 호구단자 분석  

소장하고 있는 호구단자는 31건이며 여기에 소송(訴訟) 단자 7건을 더하면 모두 38건이다. 여기서는 호구단자만을 분석대상으로 하였고, 소장 호구단자는 관인이 찍혀 있는 준호구(準戶口)라는 점에서 그 자료적 가치가 높다. 31건의 호구단자 가운데 30건이 춘천지역 자료로 1759년에서 1876년까지로 117년간의 호구 기록이다. 서면 지역 호구단자가 21건으로 반송리(盤松里, 월송리 지역) 14건, 권산리(權山里, 서상리 지역) 5건, 수정리(水井里, 월송리 지역) 1건, 오매리(梧梅里, 신매리 일대) 1건이다. 이외에 사북면 신포리(新浦里) 1건, 대판리(大板里, 조운동 일대) 1건, 삼천리(三川里, 삼천동 일대) 6건, 동면 사기촌(沙器村) 1건이다. 대판리 관련 호구단자는 희소성이 있는 문건으로 춘천 중심가 양반 가문의 식솔 수와 가구의 구성을 살필 수 있는 자료다.

  

 1) 남내면 삼천리 관련 자료 6건 모두는 유학(幼學) 최인구(崔寅矩)의 호구단자로 1852년, 1855년, 1859년, 1864년, 1866년, 1873년에 작성하였으며, 일대(一代)의 가구 구성원 변화를 살필 수 있는 자료이다. 

 2) 권산리 관련 자료 5건은 세 세대 두 가구에 걸치는 호구단자로 유학(幼學) 최준해(崔準海, 1759년) 유학(幼學) 최백해(崔白海, 1777년) 생원(生員) 최내수(崔乃秀, 1831년) 진사(進士) 최윤수(崔胤秀, 1837년) 유학(幼學) 최광련(崔光鍊, 1849년)으로 이어지며, 90여 년간의 세 세대의 가구 구성원의 변화를 살필 수 있는 자료이다. 유학(幼學) 최준해(崔準海)는 신포리로 이주해 1805년 작성한 호구단자가 있으며, 유학(幼學) 최광련(崔光鍊)은 벼슬길에 올랐다가 오매리로 이주하여 1864년 작성한 호구단자가 있어서, 벼슬 후의 가구 구성원의 변화 양상을 살필 수 있는 자료가 된다.

 3) 서면 반송리 자료 14건은 세 세대 세 가구를 대상으로 작성된 호구단자로 유학(幼學) 이의격(李宜格, 1805년 1808년 1811년 1817년 1822년 1823년) - 유학(幼學) 이보일(李普一, 1828년 1834년) - 유학(幼學) 이익호[李益祜, 생부 유학 이보일(李普一), 1837년 1840년 / 개명(改名) 응호(膺祜) 1849년] - 유학(幼學) 이경호[李暻祜, 조유학(祖幼學) 이의격(李宜格) 1843년] - 유학(幼學) 이태호(李泰祜, 생부 학생 이보일(李普一) 1867년 1876년]로 이어진다. 71년간 세 세대 세 가구의 구성원 변화를 살필 수 있는 자료이기도 하면서 한 가문 내 식솔(食率)인 자손과 노비 수(數)의 변화를 살필 수 있는 자료이다.

 4) 부내(府內) 대판리 자료 1건은 유학(幼學) 조운우(趙雲羽, 1825년)의 호구단자로 양반 사대부의 부내 가구 구성을 살필 수 있는 자료다. 

 5) 서면 수정리 자료 1건은 유학(幼學) 이하실(李夏宲, 1795년)의 호구단자로 처외가의 식솔이 동거하는 상황을 보여주는 자료이다. 동면 사기촌 자료 1건은 유학(幼學) 이달배(李達培, 1822년)의 준호구로, 거주지에 사는 사람을 관원이 직접 확인한 표지(標識)가 남아 있는 자료라는 점에서 그 가치가 크다.

 

춘천의 보물 168건의 고문서 특집 기고를 마치며

 대부분의 고문서가 춘천 관련 자료라는 점에서 무엇보다 그 가치가 인정된다. 고문서는 18세기~19세기에 걸친 춘천의 사회 경제 문화사 연구에 실증적 자료로서 전문연구자에게 특별하기도 하지만, 특정 시기의 춘천의 호구단자 분석을 통한 신분 구성, 토지 가격과 그 거래에 따른 관련자의 변화 양상을 구체적으로 살필 수 있는 자료로 그 가치가 크다고 할 수 있다. 춘천의 18~19세기 모습에 실제로 접근하기 위해서는 이러한 고문서에 대한 발굴을 바탕으로 여기에 면밀한 분석과 연구가 필요하다. 이번까지 3회의 특집 기고가 춘천 고문서 연구의 시금석이 되기를 기대하며 집필을 마친다. 200년 전의 즐거운 춘천 여행이었고, 이 여행의 둘레길을 제공해 주신 소설가 김현식 소장자에게 감사의 말씀을 전한다.

허준구 (춘천문화원 춘천학연구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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