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본 김유정 전집 / 김유정 / 강

나뭇잎 떨어지는 소리와 샘물 소리가 귓가에 들릴 만큼 조용한 고즈넉한 가을밤. 아무도 올 것 같지 않은 시골집마당에 한 여인이 들어온다. 핼쑥한 검붉은 얼굴에 머리에 썼던 수건을 벗어들고는 한밤중 맨발에 짚신만 신은 채로. 이 여자는 왜 이 밤중에 홀로 헐벗은 채로 산속의 보잘것없는 이 시골집을 찾아온 걸까? 주인집 여자는 남은 찬밥을 나그네에게 챙겨주고 말도 걸어보지만 도통 대답이 없다. 

하루 벌어 하루 먹고 살기도 힘든 시절. 난 이런 시절을 살아보지 않았다. 먹을 것이 부족한 적도 없었고 돈을 벌어야 하루를 살 수 있을 만큼 가난해 본 적도 없다. 하고 싶은 만큼 공부를 했고 지금도 내가 하고 싶은 것을 하면서 살고 있다. 내가 처한 상황에 어쩔 수 없이 떠밀려 지금 내가 처한 현실이 맘에 들지 않아도 버티면서 살아야 하기 때문에 살아본 경험이 없다. 

하지만 김유정의 소설은 내가 이 소설을 읽지 않았다면 절대 이해할 수 없는 행동을 하는 이 헐벗은 여자를 마음으로 이해할 수 있게 만들었다. 김유정 소설은 팩트를 전달하고 일방적으로 사실을 받아들일 수밖에 없는 뉴스나 가십거리로 무엇이 진짜인지 가짜인지 알 수 없는 수많은 정보들과는 완전 다르다. 허구의 인물로 꾸며낸 이야기이지만, 절대 무시할 수 없는 현실에서 문제의식을 느낀 작가가 하고 싶은 말을 김유정은 소설이라는 형식을 빌려 우리들에게 말하고 있기 때문이다. 

<산골나그네>는 어느 시대를 살고 있건, 이 소설을 읽는 사람이 누구이건 간에 이 소설을 읽는 독자에게 울림이 있는 김유정이 살았던 그 시대를 있는 그대로 보여준다. 오랜 시간이 지나도 그 시대를 살아보지 않아도 김유정이 하고 싶었던 말이 2023년도에 살고 있는 나에게 전달되는 것은 문학이 가진 김유정 소설의 힘이다. 

춘천으로 이사와 김유정 책만들기 모임을 시작한 지 6개월. 김유정 책만들기의 첫 소설이 바로 《원본 김유정전집》의 <산골나그네>였다. 고작 몇 페이지밖에 안 되는 이 단편소설은 김유정의 소설을 조금 더 읽기 쉬운, 김유정을 좀 더 잘 알리기 위한 책을 만들어보자는 생각으로 처음 만난 우리 6명을 단번에 사로잡았다. 

이 소설 속의 주인공은 단 3명. 야밤에 남의 집에서 먹고 자는 신세를 질 수밖에 없는 배고프고 헐벗은 여인과 이 집의 주인이자 하루 벌어먹고 살기도 힘든 노총각 아들과 단둘이 사는 또 한 명의 여인. 두 여인은 우연히 만났지만, 사람의 인연이 묘한 것일까? 이 두 여인은 며느리와 시어머니 관계로 발전한다. 먹고 살기도 힘든 팍팍한 현실에서 노총각 아들을 장가보내 손자를 보는 것이 소원인 홀어머니에겐 복덩이가 굴러들어온 셈이다. 노총각 아들의 짝이 되어주는 것만으로도 고마운 일. 이 나그네를 그냥 놓칠 순 없다. 주인 여자는 나그네를 살뜰히 챙기고 갈 곳 없는 이 여인도 홀어머니와 노총각이 사는 산골 외딴집에서 동네 남자들에게 술을 따르고 울먹이면서도 모르는 남자들의 비위를 맞춰가며 시어머니의 부탁을 기꺼이 들어준다. “아주머니 젊은 갈보 사왔다지유? 좀 보여주게유.”

소설이지만 읽으면서 심장이 떨렸다. 화가 났다고 해야 할까? 이 시절엔 먹고 살기 힘들어서 여자가 몸 파는 일은 당연한 일이었나? 같은 여자이면서 어떻게 이런 부탁을 처음 보는 여자에게 할 수가 있지? 대체 이 여자는 왜 술 시중을 울면서 들어 주는 거야? 대체 이 집 아들 덕돌이는 제정신인가? 도통 이해가 되지 않았다. 나 같으면 그 자리를 박차고 나갔을 텐데…. 

그런데 책을 읽으면서 김유정이 우리에게 하고 싶은 말이 무엇인지 조금씩 알게 되었다. 어쩔 수 없는 선택. 잘못된 걸 알면서도 내가 해야만 하는 선택. 그 선택의 결과는 정말 반전이다. 이런 결말을 상상하지 못했기 때문일 수도 있고 주인공의 입장에 내가 너무 몰입돼서 일 수도 있지만, 아직 김유정의 <산골나그네>를 읽어보지 않았다면 꼭 한번 읽어보시길. 김유정의 그림 같은 표현들과 시대를 알 수 있는 어렵지만 예쁜 우리말과 사투리를 살리고 좀 더 편하게 김유정의 소설을 마음으로 읽을 수 있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춘천에 사는 6명이 모였다. 지난 6개월간 매주 화요일. 머리를 맞대고 김유정 소설의 표현에 감탄하고 새로 알게 된 것들을 정리하면서 새롭게 보게 된 김유정의 <산골나그네>. <산골나그네>를 다 같이 읽던 마지막 날. 우리 모두는 이 문장에서 모두 너나 할 것 없이 한마디씩을 하느라 시간 가는 줄 몰랐다.

“옷이 너머 커- 좀 저것엇으면….” 

못난 놈. 덕돌이보다 못난 놈이 있었다. 김유정을 만나고 싶다면 짧지만, 속 터지는 예상치 못한 반전의 재미가 있는 산골나그네를 꼭 한번 읽어보시기를…….

김지혜(책방달방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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