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1운동 97주년이다. 일제의 강점으로부터 독립하기 위한 전 민족적인 만세시위는 비록 많은 피해를 남기고 좌절됐지만, 우리 민족의 민족적·사회적 의식을 크게 각성시켰다. 3·1운동은 전국 방방곡곡에 걸쳐 실로 유례가 없는 민족적 항거였다. 강원도라고 예외일 수는 없었다. <춘천사람들>이 3·1운동 97주년을 맞아 춘천의 3·1운동을 조명해 봤다.

춘천의 3·1운동을 살펴보기 전에 먼저 강원지역의 3·1운동을 간단히 언급할 필요가 있다. 전체적인 흐름을 파악하는 것이 중요하기 때문이다. 강원지역의 3·1운동은 대체로 경원선이 지나는 교통의 요충지인 철원을 기점으로 두 축으로 확산됐다. 한 축은 원산가도를 따라 김화·금성·회양 방면으로, 또 다른 한 축은 충주가도를 따라 화천·춘천·홍천 방면으로 진행됐다.

강원지역 만세시위는 3월 10일 철원에서 3일간 벌어진 시위를 시작으로 4월 중순까지 대부분의 지역에서 매일 발생해 5월 9일 양양 시위를 끝으로 일단락 됐다. 특히 양양과 화천, 횡성과 홍천에서 비교적 격렬했고 많은 사상자가 발생했다. 시위양태도 초기에는 평화적인 시위가 주를 이뤘으나 점차 무력시위나 횃불시위로 발전했다.

일제의 관헌자료에 따르면, 강원도에서 3월과 4월 두 달 동안 56건의 시위가 발생해 22명이 사망하고 68명이 부상당했다고 한다. 그러나 박은식의 《독립운동지혈사》에 따르면, 모두 57회에 연인원 9만9천510명이 참가했고 사망자가 144명, 부상자가 645명, 피검자가 1천250명에 달했다고 한다. 일제의 통계는 의도적으로 축소시킨 경우가 많아 그대로 믿을 수 없다. 연구자들에 따르면 미수에 그친 27건을 제외하고도 90여건의 시위에 총 6만5천400명이 참가해 사망자가 37명 이상 발생했으며, 검거된 사람은 1천156명이라고 한다.

만세시위는 대체로 독립선언서를 통해 촉발됐다. 거사일 직전인 2월 27일 밤 11시에 보성사에서 인쇄된 독립선언서 2만1천매는 이종일을 통해 각 지방별로 배부됐다. 강원지역은 안상덕을 통해 전달됐는데, 안상덕은 이종일에게 2천매를 받아 강원도와 함경도에 전달하는 책임을 맡았다. 2월 28일 안상덕은 경원선을 이용해 평강의 천도교평강교구장인 이태윤에게 600~700매를 전달하고 원산으로 향했다. 이태윤은 3월 1일 평강교구에서 대책회의를 갖고 배포계획을 수립했다. 이에 따라 춘천·양구·인제지역 책임자 임종한과 신윤철이 3월 4일에 150매를 가지고 춘천에 잠입했다. 그러나 이들은 춘천의 한 여인숙에서 일경에 체포돼 선언서를 압수당하고 말았다.

춘천에서는 천도교측의 움직임이 가장 빨랐다. 천도교 춘천교구장 이준용과 봉훈 윤도순은 북산면 조교리에 사는 박순교 등과 시위를 계획하고, 3월 10일에 허기연 등 여러 명이 모인 가운데 시위를 벌일 것을 설득했다. 13일에는 가연리(현 낙원동)의 안동식을 방문해 참여를 권유했고, 14일에는 신남면 송암리(현 칠송동) 차성강의 집에서 차상덕 등에게 읍내에 집결해 시위할 것을 선동했다. 그러나 윤도순이 일경에 체포됨으로써 계획은 무산되고 말았다.

이에 다시 이준용·박순교·허기준은 3월 28일 춘천장터에서 만세시위를 벌일 것을 결정했다. 28일 장터 길목에서 헌병과 수비대가 삼엄한 경계를 펼치고 있었지만, 이들은 계획대로 장터에 잠입할 수 있었다. 이날 수십 명이 대한독립만세를 외쳤는데, 헌병보조원이던 허현도 민족적 양심에 총을 버리고 시위군중에 가담했다. 이들은 모두 체포됐다. 특히 허현은 모진 고문으로 성불구자가 돼 감옥살이를 했다고 한다.

27일에는 신북면 청평리에서 김봉희가 주민들을 선동해 독립만세를 부르려다 체포됐다. 31일엔 사북면 오탄리에서 이교관이 최기환 집에서 최기환·김공모 등과 협의해 4월 1일 해질녘에 대한독립만세를 외치며 일본인이 경영하는 숯공장과 면사무소를 공격하기로 결의하고 한의봉·박순일·김순원·김춘택 등에게 회부했으나 이교관이 체포되면서 무산되고 말았다.

4월 23일 춘천 출신인 이병천은 임시정부포고문과 국민대회 취지서를 가지고 춘천에 와서 미국인 선교사 테일러의 한국어 교사인 김홍범에게 전달했다. 김홍범은 춘천에 있던 홍천교회 원익상에게 전달했다. 원익상은 다시 춘천의 기독교도와 한국인 관리들에게 선포문과 취지서를 배포하면서 파리강화회의에서 한국의 독립문제가 토의될 것이라며 한국인 관리들의 사표제출과 독립만세를 권고했다. 그러나 돼지우리에 숨겨둔 독립운동 관계문서들이 발각돼 압수되면서 무산되고 말았다.

이후 11월 29일 가연리의 남감리교파 전도사 김조길이 서울 세브란스의학전문학교 학생인 송춘근과 협의해 선언서와 독립문서 등을 전달받아 29일과 30일 사이에 김민수·엄중환·지달원·김광호·홍종숙 등에게 배포했으나 12월 21일 모두 체포되고 말았다.

이처럼 춘천의 만세시위는 전개됐을 뿐만 아니라 대부분 사전에 발각돼 무산되는 경우가 많았고, 실제 벌어진 시위도 수십 명에 불과했다. 춘천이 도청소재지로서 관공서가 집중돼 있고 헌병대와 보병 1개 중대가 주둔해 있어 감시와 경계가 엄중했던 탓으로 보인다. 그러나 규모와 정도를 떠나 지속적으로 전개된 이러한 저항의 몸짓으로 말미암아 이후 청년운동 등 1920년대 사회운동이 기지개를 켤 수 있었다.

전흥우 시민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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