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충호 편집위원
이충호 편집위원

쉰을 넘긴 세대에게는 ‘월남전 김 상사’로만 얽혀있던 베트남이 박항서 감독을 만나 새로이 국교를 맺은 나라로 다가왔다. 젊은이에게는 거의 축구동맹을 맺은 신생국가나 다름없다. 이제는 국가 단위의 축구 소식들 틈새로 아기자기하고 말랑말랑한 도시 단위 소식까지 들어와 미소를 덤으로 안긴다. 

1993년 유네스코 세계 문화유산에 등록된 천년고도 후에(Hue)시의 이야기다. 베트남에서 도시 전체가 하나의 유적지가 되다시피 한 유일한 도시라고 한다. 경기도 남양주시가 우호 교류 협정 체결을 기념해 유영호 작가의 조각상 ‘그리팅 맨(Greeting Man·인사하는 사람)’을 선물하고 싶다고 제안한 도시다. 머리 숙여 인사하는 거인을 형상화해 평화와 우정을 상징하는 ‘그리팅 맨’은 국내 지자체는 물론 우루과이 몬테비데오, 파나마 파나마시티, 에콰도르 키토시 등 해외 곳곳에도 설치될 만큼 유명세를 타고 있는 조각상이다. 

하지만 후에 시는 높이 6m에 달하는 조각상의 크기를 문제 삼았다. 남양주시는 후에성(城)과 후에문화센터 맞은편에 있는 공원, 동바시장 등을 설치 장소로 제안했지만 후에 시는 이 조각상이 도시 경관을 해친다고 보고 흐엉강 제방에 설치하는 방안을 검토했다. 관련 전문가는 더 나아가 조각상 크기를 줄여 흐엉강 남쪽 제방에 설치하는 게 좋겠다는 의견을 제시했다. 강을 따라 설치된 다른 예술작품과 비교했을 때 너무 커서 어울리지 않는다는 게 그 이유였다.

후에 시는 남양주시 측에 조각상의 크기를 줄여줄 것을 공식 제안하기로 결정했다. 베트남 마지막 왕조인 응우옌 왕조(1802∼1945년)의 수도였고 한때 ‘평화의 도시’라는 뜻의 딴 호아(Than Hoa)로 불렸던 그야말로 베트남 역사·문화의 중심지 후에 시다운 결정이다. 

베트남은 현대사의 비극을 상징하는 나라답게 거의 모든 도시가 그 상흔을 안고 있다. 왕조 건설과 막후 정치에 개입했던 프랑스, 그리고 1만 6천km를 날아와 전쟁을 벌이고 패퇴한 미국과 동맹국의 파괴행위는 베트남에 유적지를 거의 남겨 놓지 않았다. 그러기에 베트남은 물론 모든 지자체가 관광객을 유치할 만한 이벤트나 장식물에 목말라 있을 수도 있다. 하지만 그들은 선물보다 역사와 유물과의 어울림을 먼저 생각했고 도시 미관을 우선시했다. 주겠다는 선물을 덥석 받는 게 아니라 고민하며 받는 그들의 문화정신에 고개가 끄덕여지는 한편 그들의 자세가 부럽기도 했다.

선물을 받으면서도 완곡히 자신의 도시에 맞도록 주문하는 후에 시의 당당함을 보면서 레고랜드와 강원도 그리고 강원도의회를 생각한다. 우리나라의 법체계에 따르면 500억원 이상인 신규사업은 행정안전부 장관이 정하여 고시하는 전문기관으로부터 타당성 조사와 투자심사를 받아야 한다. 하지만 강원도는 도의회의 승인이 허가장이라도 되는 듯 레고랜드 관계사에 800억원 투자를 결정했다. 불법이다. 도의원들은 해당 MDA(총괄개발협약) 서류의 원본도 확인 못한 상태에서 공무원들이 제공한 서류만을 검토·심의하고 승인했다. 직무유기다. 물론 강원도와 도의회는 불법과 위법, 직무유기라는 혐의를 질식시킬 탈법과 궤변도 마련해 놓았을 것이다.

춘천시민의 정신적 문화적 안식처인 중도 위에서 벌어지는 ‘레고랜드 불평등 노예계약’에 대해 시민마저 그 심각성을 깨치지 못한다면 문화유적에 대한 우리의 무례 외에 그 무엇으로 설명할 수 있을까.

저작권자 © 《춘천사람들》 - 춘천시민의 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