춘천여성민우회 정윤경 대표

‘n번방’ 디지털 성범죄는 충격과 전율 그 자체였다. 협박으로 성착취물을 찍어 유포한 ‘n번방’ 일당의 악랄한 수법에 시민들은 경악을 금치 못했다. 범죄 가담자들의 엄벌을 촉구하는 시위가 잇따르고, 이번만큼은 성착취 범죄를 뿌리 뽑자는 공감대도 확산하고 있다. 이러한 연대의 중심에는 언제나 한국여성민우회가 자리해 왔다. 오랫동안 ‘성 평등한 세상’의 실현을 위해 노력해 온 춘천여성민우회 정윤경 대표를 만나 우리사회의 ‘성 불평등’과 그로 인한 ‘성범죄’ 실태에 대한 진단과 처방을 들었다.

 

오프라인의 성범죄가 디지털 공간으로 확산되고 있습니다. 우리사회에서 성범죄가 꺾이지 않는 이유가 무엇이라 생각하시는지요?

한국에는 아직 ‘강간 문화’가 만연해 있는 것 같습니다. 최근에 불거진 ‘팬티 빨기’ 사건 아시나요? 초등학교 교사가 8살 아이에게 팬티를 빨게 만들고, 그 사진을 찍었죠. 문제는 이런 일이 이번만이 아니라 과거에도 있었다는 겁니다. 그때도 사진들이 다 공유가 됐습니다. 학교에서까지 이런 행태가 저질러지는 까닭은 그만큼 우리 일상에 ‘강간 문화’가 팽배해 있기 때문입니다.

‘n번방’ 사건으로 불리는 텔레그램 성착취 사건의 주범 중 하나인 ‘로리대장태범’ 배 모씨의 재판이 있었던 지난 1일 춘천지방검찰청과 춘천지방법원 앞에서는 가해자 엄중 처벌을 요구하는 기자회견과 피켓 시위가 진행됐다. 

‘n번방’은 원래 있어왔던 성범죄가 오프라인에서 온라인으로 범행 장소를 넓히고 있음을 보여줍니다. 예전에는 주로 오프라인에서 자행했던 성추행, 성폭행, 성매매 같은 범죄를 이제 온라인에서도 저지르고 있습니다. 그런데, 온라인 성범죄는 가해자가 느끼는 죄책감이 오프라인보다 적을 수 있다는 점에서 더 심각한 위험을 내포하고 있습니다. 게다가, ‘n번방’의 10대 가해자들처럼 성범죄자들이 온라인 세계를 너무 잘 알고 있기 때문에 그만큼 적발과 처벌이 어렵다는 문제도 있습니다. 이런 점에서 기성세대들이 온라인 공간에서 어떤 일들이 벌어지고 있는지, 좀 더 관심을 갖고 그 세계를 이해할 필요가 있다고 봅니다.

중요한 점은, ‘강간 문화’는 여성 단체, 시민 단체만의 문제가 아니라는 겁니다. 사회구성원 모두가 결연하게 ‘강간 문화’를 거부해야 합니다. 만약에 회식 자리에서 성추행을 봤다면 단호하게 ‘잘못된 언행이다’ ‘당장 멈춰라’라고 말해야 합니다. 피해자가 아니라 공동체가 한 목소리로 ‘강간 문화’를 질타할 때, 그때 비로소 변화가 시작될 겁니다.

정부는 ‘n번방’ 같은 새로운 유형의 성범죄를 막기 위해 지난달 23일 ‘디지털 성범죄 근절 대책’을 발표했습니다. 이 대책이 실효를 거둘 것으로 보시는지요?

최근에 정부가 발표한 대책을 저도 살펴봤습니다. 교육부, 과기정통부, 법무부, 경찰청 같은 여러 관계부처가 합동으로 마련했다는 점에서 진일보한 측면이 있습니다. 그럼에도, 한국 법은 성범죄에 대한 형벌이 강하지 않다는 문제점이 여전히 남아 있습니다.

성범죄의 형벌은 판사의 양형기준에 따라 좌지우지 되는데, 10년 형을 받을 수 있는 범죄라 하더라도 1년형으로 줄일 수가 있습니다. 가해자가 ‘어리니까, 초범이니까, 호기심에 했으니까’ 라는 감형 이유를 들이대는 거죠. 하지만 이런 온정주의 때문에 엄중 처벌을 하지 않는다면 디지털 성범죄는 계속 일어날 겁니다.

‘n번방’ 사건으로 불리는 텔레그램 성착취 사건의 주범 중 하나인 ‘로리대장태범’ 배 모씨의 재판이 있었던 지난 1일 춘천지방검찰청과 춘천지방법원 앞에서는 가해자 엄중 처벌을 요구하는 기자회견과 피켓 시위를 진행됐다. 위 사진에서 마이크를 잡고 관련 성명서를 발표하는 이가 춘천여성민우회 정윤경 대표다.
춘천여성민우회 정윤경 대표는 ‘n번방’ 가해자 엄중 처벌 관련 성명서를 발표했다.

법원이 ‘n번방’ 가담자들에게 어떤 형량을 선고할 것인가는 매우 중요한 문제입니다. 잠재적 성범죄자들에게 영향을 미치기 때문입니다. 법원의 판결은 디지털 성범죄 근절 여부를 가늠할 수 있는 기준이 될 수도 있습니다.

춘천여성민우회는 ‘디지털성폭력대응 강원미투행동연대’와 함께 다양한 활동을 해 왔습니다. 지금은 어떤 활동에 주력하시는지, 그리고 앞으로 어떤 활동을 계획하시는지 궁금합니다.

춘천여성민우회는 강원미투행동연대와 함께 3월 30일 이후 춘천지방법원 앞에서 성명서를 발표하고, 피켓 시위를 해 왔습니다. 그 이유는 법원이 범죄에 대해 최종 판단을 내리는 곳이기 때문입니다. 이런 이유로 법정 모니터링을 지속하면서 경각심을 주기 위한 1인 시위를 매일 하고 있습니다. 이런 활동을 자료로 정리해 알릴 계획입니다. 여러 단체와 함게 ‘n번방’ 관련 현수막을 제작해 강원도 전역에 게시하는 활동도 시작했습니다. 

디지털 성범죄 피해자들에게 하고 싶은 말씀이 있으시다면...?

무엇보다, 결단코 ‘피해자의 잘못이 아니다’라는 점을 강조하고 싶습니다. ‘피해자도 잘못이 있겠지’라고 생각하는 사람은 피해자들의 용기를 꺾는 2차 가해자입니다. 

피해자들의 사연은 저마다 다를 수 있습니다. 하지만 어떤 경우라도 피해자가 비난 받을 이유는 없습니다. 모든 공동체가 ‘피해자는 결단코 잘못이 없다’는 사실에 공감해야 합니다. 그리고 주저함 없이 그렇게 말해야 합니다. 가해자가 제일 무서워하는 것은 자신의 피해를 공개적으로 밝히는 피해자의 용기입니다.

춘천여성민우회 정윤경 대표

피해자 분들도 용기 내어 제보하고 신고하셨으면 좋겠습니다. 그 용기는 가해자들을 두렵게 하고, 잔인한 성범죄를 막을 수 있습니다.

여성가족부는 디지털 성범죄 지원센터를 운영하고 있습니다. 홈페이지 게시판을 통해 상담 신청, 피해 영상 삭제 요청할 수 있고 수사, 법률, 의료 지원을 연계해서 받을 수 있습니다. 비공개로 진행돼 비밀보장도 가능합니다. 피해자의 지인 분들이 피해자를 지지해주고 항상 연대해주면 좋겠습니다. 함께 분노하고 도울 사람이 곁에 있다는 사실을 잊지 말기 바랍니다.

시민들의 관심과 도움도 필요할 것 같습니다. 성범죄 근절을 위한 시민들의 역할은 무엇일까요?

디지털 성범죄는 반드시 처벌해야 할 악질범죄라는 사실에 모두가 공감해야 합니다. 잠시 관심을 가졌다가 잊는 것이 아니라, 디지털 성범죄가 일상에서 사라질 때까지 시민 공동체가 함께 분노하고 감시해야 합니다. 가해자가 ‘반성 하는 것 같다. 초범이고 어리니까’ 따위의 온정주의에 빠져들어선 안 됩니다. 엄중한 처벌로 끊어내야 합니다. 디지털 성범죄의 가해자를 반드시 응징하겠다는 신념을 공유해야 합니다.

성다혜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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