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국어교육과정에 ‘온작품읽기’라는 활동이 추가되었다. 교과서에 제시되는 짧은 이야기에서 단편적 정보를 확인하는 것보다 긴 호흡으로 하나의 문학작품을 읽어낼 수 있는 활동이 아이들의 읽기 역량을 높이고 다양한 수업활동을 하는데 더 좋기 때문이다. 하지만 코로나19 상황으로 인해 원격수업과 등교수업이 병행되면서 온전하게 작품에 빠지는 온작품읽기 활동을 하기가 다소 난감한 상황이 되었다. 결국 내가 궁여지책으로 생각한 활동은 ‘오디오북’처럼 책을 읽어서 올려주고 아이들이 그 내용을 듣는 활동이었다.올해 읽어준 책은 《몽실언니》였다.
“선생님, 책을 왜 읽어야 하나요?”직업이 국어교사인 나에게 책읽기는 숨쉬기와 같은 것이었다. 학교에서 만나는 아이들은 책읽기와 글쓰기를 가르치는 나를 아주 당연하게 받아들였다. 입시에 필요하기도 하고, 국·영·수의 첫 부분을 당당히 차지한 과목 선생님의 가르침에 의문을 제기할 용기도 관심도 없었을 것이다. 그런 내가 존재의 근원을 흔들게 하는 질문을 만난 것이다. 그 뒤에 숨어 있는 문장은 (아마도) “지금껏 책을 읽지 않고도 잘 살아왔는데”일 것임이 분명하기에 책읽기의 효용을 증명해야 했다. 다양한 설득의 말에도 도무지 공감 못
아기가 태어나면서 코로나19 시대를 만났다. 단절된 세상에서 휴대폰은 초보 엄마에게 백과사전이자 육아 동지와 소통하는 창구였다. 아이가 아프면 휴대폰을 먼저 켰고 아이를 돌보는 방법도 휴대폰으로 찾았다. 맘카페 육아 동지들에게도 물었다. 팝콘처럼 댓글이 튀어 올랐다. 이 방법 저 방법 좋다는 것들을 하며 아이를 길렀지만 육아는 쉽지 않았고 나는 점점 지쳐갔다.그때 마침 육아서 한 권을 읽었다. 특별한 비법이 있는 책도 아니었고 정답을 알려주는 책도 아니었다. 아기의 행동을 관찰하고 아기의 세계를 함께하라는 뜬구름 같은 얘기였다. 지
나는 교사지만 공부를 못 했다. 초등학교 시절부터 ‘책’과는 거리가 멀었고 ‘전자오락실’은 가까웠다. 당시 ‘보글보글’이 유행하다가 ‘스트리트파이트’로 진화하였고 그것은 우리 세대 최고의 게임이었다. 나의 어린 시절에는 핸드폰이 없는 시기였기에 조금 논다는 친구들은 오락실로 다 모였다. 엄마는 나를 매일 오락실로 찾으러 오셨다.이런 내가 우리 아이들에게 스마트폰을 내려놓고 책을 보자고 이야기하자니 어색하다. 그래서 그냥 솔직해지기로 했다. 선생님도 어린 시절 “너희들과 마찬가지로 그랬다고…. 어른이 되어서도 책보다는 스마트폰에 더
얼마 전 TV에서 유명 개그맨이 나팔바지에 각진 안경에 바가지머리를 하고 나타났다. 뒷배경엔 과거 부잣집에서나 볼 수 있는 자개장이 벽을 가득 채우고 있었다. 순간 할머니댁이 생각나며 나의 어렸을 적 추억이 되살아났다. 왜 많은 사람들이 이러한 ‘레트로’ 문화를 구식이고 촌스럽다고 생각하지 않고 선호하게 된 것일까? 그 이유는 자개장을 보며 어렸을 때 추억을 회상하던 나의 모습에서 찾아볼 수 있을 것이다. 레트로 문화가 현재를 살아가는 우리들의 감성을 자극하고 위안이 되고 있기 때문이다.감성은 감정과 달리 우리의 가슴을 따뜻하게 해
올해 초에 EBS에서 방영한 이 화제가 되었다. 소득격차가 사회적 격차로 연결되는 상황, 코로나19로 제대로 등교하지 못했던 학생들 문제와 맞물려 문해력이 주목받은 것이다. 문해력이라 통칭하지만, 자세히 들여다보면 문장 문해력, 문서 문해력, 수 문해력 등 여러 갈래가 있다. 어휘력, 유창성, 독서력 등도 문해력을 구성하는 요소이다. 읽고 이해하고 해석할 수 있어야 문해력이 높아지는 건 당연한 말씀이다.학교에 있다 보면 책읽기가 너무 싫다는 학생을 자주 만난다. 억지로 읽어야 하고, 책읽기가 무의미하다고 느끼기 때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