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창수(시인)

신념은 ‘믿는 마음’이지만 그 믿음이 외곬일 때 그것은 고집불통의 억지가 되고, ‘믿고 싶은 마음’으로 굳어지고, 그것은 결국 누군가 혹은 뭔가를 옭아매는 이유와 근거와 구실로 기능한다. 내 신념의 바탕에 “내가 틀릴 수도 있다”는 가능성을 항상 깔아두려 애쓰는 것은 이 때문이다. ‘진짜’는 진짜가 아닐 수도 있다는 허여(許與) 위에서만 겨우 가능해질 수 있다는 것 - 불통을 깨트리는 유일한 길일지도 모른다. 종일 우울한 기분에 싸여 아무것도 하지 못하다가 저녁을 먹고 나서 겨우 책상 앞에 앉았다. 욱하고 화가 날 때는 여전히 “내가 옳다”는 가짜 신념에 지고 마는 도로(徒勞)에서 언제쯤이나 벗어날 수 있을지. 얼마나 더 나이를 먹어야 온전히 너그러워질 수 있을지… 생각하니 다시 침울해진다.


젊다는 것

좋은 문학서적의 태반은 ‘젊음’에 대한 예찬에 바쳐진다. 주인공의 물리적 나이와는 상관이 없다. 나이만 늙었지 그의 정신과 영혼은 ‘젊음’에 놓여 있다. 그의 활력이 그의 물리적 나이를 한껏 되돌려놓는 데에 시인과 작가는 온 힘을 기울인다. 그렇게 다시 태어난 ‘젊음’을 확인하고 책장을 덮으며 떠오르는 미소는 읽는 이에게 전이된다. 그러나 그 많은 시인과 작가들이 ‘젊음’을 이야기하기 위해 전력을 다하는 것은 일종의 역설이다. 속절없이 ‘늙음’으로 추락해가는 것이 거개의 인생이라는 것, 어느 속 깊은 젊은 뮤지션의 가사처럼 “그저 늙어 죽을 생각만 하는” 인류가 안타깝기 때문이다. 지금 겨우 서른을 넘긴 젊디젊은 야당대표의, 어떤 노회한 정치꾼보다 노회해져 버린 모습에서 여실하게 확인되는 일이다. 지혜의 피를 팔아서라도 젊음을 회복하고 싶었던 괴테의 문학적 수혈이 켜켜이 녹아있는 〈빌헬름 마이스터 수업시대〉의 몇몇 장면들이 4월, 어쩔 수 없이 봄날로 가고 있는 이 아득한 시절의 첫날을 스쳐간다.


위다웃 마스크

연식이 좀 된 사람이면, 1990년대 초, 당시 조각미남을 대표하던 미키 루크가 주연한 〈쟈니 핸섬〉이란 영화를 기억할 것이다. 미키 루크는 영화 초반 괴물 같은 얼굴로 등장하고, 친구들로부터 “Handsome Johnny, you don’t need a mask(핸섬한 쟈니는 마스크가 필요없어)”라는 모욕적인 말을 일상처럼 듣는다. 그러다 범죄에 휘말린 그는 자신을 이해해주었던 유일한 친구를 잃는다. 이후 우여곡절 끝에 심리치료와 성형수술을 받고 진짜 ‘핸섬한’ 사나이로 거듭나는데… 실제 미키 루크가 성형으로 탄생한 배우라는 사실이 묘하게 겹치는 영화다. 

4월 중순쯤이면 실내에서만 마스크를 쓰게 될지도 모른다는 기사를 보다가 〈쟈니 핸섬〉의 그 “마스크가 필요 없어”라는 대사가 떠올랐다. 마스크를 벗는 시절이 올까, 싶었는데, 실제로 그렇게 된다면 마스크를 쓰고 다니는 게 어색했던 2년 전과는 정반대로 한동안은 벗고 다니는 게 어색할는지도 모르겠다 싶다. 사실, 마스크로 얼굴의 반을, 얼굴 작은 사람은 거의 2/3나 가린다는 건, 그 자체로 매우 ‘범죄적’이다. 코로나19 내내 미국과 유럽에서 마스크를 쓰지 말자는 얘기가 끊이지 않은 건 그 때문이었다. 예전엔 ATM기기에서 현금을 인출할 때 모자만 깊이 눌러써도 문제가 됐었지만 이젠 마스크로 얼굴을 가려도 문제 되지 않는다. 오히려, 마스크를 써달라는 편의점 알바생의 말에 발끈해 폭행범이 되는 기이한 세상이다. 확진 추세가 현저히 줄어들어야 한다는 전제가 붙어 있긴 하지만, 거리에서 마스크를 쓰지 않은 사람들을 보는 기분이 어떨지, 괜히 설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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