류근(시인)

2번 찍은 후 윤석열 당선을 마치 자신의 승리인 양 오늘까지 행복해하는 분들, 이제 하루하루 이게 누구의 나라이고 개돼지가 누구인지 확인하게 될 거예요. 그래봤자 삶의 자세에 별 변화는 없겠지만.


학교 성적 좋은 사람이 유능한 사람이라고 배웠다. 돈 많은 사람이 성공한 사람이라고 배웠다. 유능한 사람이 되기 위해서, 성공한 사람이 되기 위해서는 무조건 이기는 사람이 되어야 했다. 이기지 못한 사람은 다 쓸모없는 사람 취급을 받았다. 

이긴 사람이든 진 사람이든 자기 자식들에게 똑같이 가르쳤다. 좋은 학교 가야 한다! 좋은 학과 가야 한다! 좋은 회사 가야 한다! 돈 많이 벌어야 한다! 힘센 사람 되어야 한다! 무조건 이겨야 한다! 이기는 사람이 선한 사람이고 지는 사람이 악한 사람이다! 

그런데 세상은 누구나 다 이길 수는 없는 것이었다. 이기는 사람이 있으면 지는 사람도 있는 것인데, 우리는 이기는 법만 가르쳤다. 지는 법을 가르치지 않았다. 이긴 사람이 살아야 하는 도덕적 책무, 진 사람이 살아야 하는 정신적 자존감에 대해서 가르치지 않았다. 이긴 사람은 도덕성을 저버리고 진 사람은 자존감을 상실했다. 

이긴 사람이든 진 사람이든 이제 모두 지옥의 시민이 되어버렸다. 인간적 품위나 도덕성, 영성, 염결성 같은 것들이 다 웃음거리가 되어버렸다. 아프리카 세렝게티의 짐승들도 건기를 앞두고는 새끼를 낳지 않는다. 이런 나라에서 아이를 낳아서 기르는 것조차가 이제 시련의 대물림이 되어버렸다. 누구도 행복이 무엇인지 알지 못한다.

증오와 갈등과 혐오와 분노와 탐욕과 폭력과 음모와 천박과 이기와 파렴치의 각축장 한가운데 오늘은 비가 오고 바람이 분다. 불길하게도 일찍 피어난 봄꽃들이 다 질 것이다. 나는 살아남은 나를 가엾어하며 슬퍼하며 또 한잔해야지. 이 집엔 순 늙고 진 이웃들만 앉아있다. 순한 초식동물들 같다. 눈물겹다.


내가 윤석열 따위 인간이 대통령 되었다고 슬퍼하는 게 아니다. 김건희 따위 인간이 대한민국 대통령 부인 되었다고 슬퍼하는 게 아니다. 한동훈 따위 인간이 득세한다고 슬퍼하는 게 아니다. 시를 배운 사람으로서,

어떻게 살든 대통령이 될 수 있고, 무슨 짓을 하든 대통령 부인이 될 수 있고, 더 무엇을 하든 득세할 수 있는 세상이 되었다는 사실을 슬퍼하고 있는 것이다. 부끄러워하고 있는 것이다. 

식민지와 전쟁과 쿠데타와 광주 민간인 학살을 겪은 상처와 후유증이 아직 치유되지 않은 나라에서, 이제 그 위에 온갖 불의와 독선과 오만과 야만의 한 줌 적폐들이 다시 권력을 구가할 수 있는 시대가 되었다. 역사의 퇴행을 눈을 뜨고 지켜보고 있는 중이다.

가치전도의 시대. 상식과 공정이라는 말이, 법과 원칙이라는 말이, 정의와 도덕이라는 말이 그 뜻을 잃었다. 이것은 단순히 권력을 ‘나쁜 자’들이 차지했다는 것 이상의 부작용을 낳는다. 공동체의 의식과 양심이 오염되고 왜곡된다. 걷잡을 수 없는 가치의 붕괴로 치닫게 된다. 작금의 역주행으로 인해 향후 우리 공동체가 치러야 할 대가는 거의 불가역에 가깝다. 

아이들에게 ‘양심을 지키고 법을 준수하고 정의롭고 도덕적으로 살아라’라고 가르치기 어렵게 되었다. ‘할 수 있으면 수단과 방법 가리지 말고 무엇이든 해도 된다’를 어른들이 다 보여줬다. 권력만 있으면, 돈만 있으면 그 어떤 악행과 범죄도 보호받는다. 이게 우리 시대의 실상이다.

배설과 섹스는 가려진 곳에서 할 때 각각의 의미와 가치를 가진다. 지금 저들은 배설과 섹스를 너무나 당연하고도 노골적으로 공개하고 과시하는 사람들 아닌가. 무속적 신념이 아니고선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대통령 집무실 이전 문제부터 시작해서 민심을 아랑곳하지 않는 몇몇 장관 인선과 검찰 독재 의지의 가시화 등을 지켜보자면 절로 식은땀이 흐른다. 세금 내는 사람들을 이 지경으로 모독해도 되는 것인가. 그런데 아직 취임조차 하지 않았다!

슬프고 부끄럽다. 시인의 예언자적 본능이 불길하게 작동한다. 종말과 멸망을 자초한 소돔성의 주민처럼, 막막하게 먼 길을 바라본다. 미친 바람이 봄꽃들을 다 떨구고 지나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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