류근(시인)

낙화-류근

봄밤에는 더 슬프더라 누이야

영산홍 달 그림자 깊을 대로 깊어서

내 안의 저 길 끊어진 빈 마을에

고단한 지붕들마저 이마를 흔들더라

누이야 아직도 눈시울 별자리에 매달며

너는 둥글고 푸르른 봄밤을 건너가느냐

돌아보면 이승의 봄이 너무 깊고

이제는 기다림마저 속절없이

아편의 꽃밭으로 글썽거리는 시절

비로소 거짓으로 꽃핀 적 없는 나무들 곁으로

갈 데 없는 마음들마저 돌아와

단정한 잎새를 반짝이는 시절

누이야

나는 살아서 병이 되는 사랑 하나로

이승의 봄날을 견디겠구나 보느냐

살아서 지은 사랑보다 

아픈 별 세상에 없다

끝내 부르지 못한 이름 뒤로 난분분

난분분 꽃이 지는 이 봄밤에

상처로 깃을 꽂는 새 한 마리

달빛 가린다 아,


아주 오래전에 소설가 이외수 선생은 새벽 3시에 전화를 해서는 꼭 이러셨다. 시인이 이 시간에 잠들어 있으면 진짜 가짜야. 나는 “진짜 가짜”라는 말의 영문도 모른 채 대답했다. 우리 동네 새들은 새벽 4시 34분에 저를 깨워요.

나는 아침 9시 40분쯤 잠을 잤다. 낮이 무서웠던 거지. 코피는 새벽에 흐르고 배꽃이 피는 시절마다 눈물이 났다. 애인은 정읍 사람이었는데 그의 애인은 전주에 살아서 주말마다 기숙사를 비웠다. 주말마다 애인을 만나러 가는 애인을 견디느라 나는 새벽에 웃어주는 배꽃을 사랑하였다. 시가 오는 시절이었다.

그래도 그러면 안 되는 거지라고 생각을 하면서도 헤겔을 읽느라 나는 저녁노을과 서양화과 여자 친구와 저녁의 길을 걸었다. 서양화과 여자 친구는 오른팔이 없었다. 왼손으로 그린 그림은 오른팔잡이들보다 붉고 푸르렀다. 내 이야기를 잘 들어주었다.

새벽 3시에 깨어있는 것은 너무나 당연하여서 나는 시를 쓰고 책을 읽었다. 슬픔과 외로움과 불안 같은 것을 견디는 방법이었다. 그 세월을 살지 않은 자들이 어찌 시인이 되나. 나는 아직도 고백하지 않은 날들이 지독히도 많다. 새벽 3시는 날마다 오고 나에겐 옛사랑이 저물지 않았다. 부질없기도 하지. 아아, 부질없기도 하지.


졸지에 고아가 된 심정입니다. 가만히 앉아있다가도 울컥울컥 눈물이 납니다. 더 갈 데 없이 가난하고 외로웠던 스물다섯 살 문청시절에 처음 만난 이후 소설가 이외수 선생은 저에게 정신적 아버지였고 선생이었고 형이었고 친구였고 동지였습니다. 무엇보다 제 시의 가장 너그러운 독자였습니다. 위기 때마다 응원병이었습니다. 가장 큰 빽이었습니다.

높은 사람 낮은 사람, 부자와 빈자, 남녀노소에 차별을 두지 않았습니다. 누구에게나 고르게 진정과 진심을 베풀었습니다. 아프고 외롭고 슬픈 사람들에게 늘 친구가 되어주었습니다. 불의한 자들을 미워하고 올바른 사람들을 사랑했습니다. 일찍이 이름을 얻었으나 오만하지 않았습니다. 선량하고 순수하고 겸손한 사람이었습니다.

마지막 순간에 웃음을 지어 보이며 평화롭게 가셨다는 전언을 들었습니다. 이외수다운 임종입니다. 영욕과 애환의 한 생애를 웃음으로 다 갈무리하고 가실 수 있어서 다행입니다. 입관식 때 오열하느라 웃음으로 배웅하지 못해 죄송합니다. 하지만 우리 다시 언젠가 환한 웃음으로 만나게 될 것입니다. 

그동안 참으로 고마웠습니다. 제 곁에, 우리 곁에 따스한 별자리로 머물러 주실 것을 믿습니다. 부디 그 나라에서 평안하시길 빕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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