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암호 주변의 역사문화 유산과 숨겨진 비경을 카누를 타며 즐기는 역사문화탐방 프로그램이 인기를 끌었다.춘천시는 지난달 22일부터 지난 19일까지 5주동안 매주 토요일 ‘춘천의 속살을 보다’ 프로그램을 운영했다. 이 프로그램은 지역문화유산 활용 프로그램의 하나로 춘천의 역사 인물과 유적의 흔적을 찾아가는 사업이다.춘천문화유산에 대한 이해와 인식 높여‘춘천의 속살을 보다’는 지난해 춘천지역의 중요 역사유적지를 돌아보는 프로그램으로 기획돼 처음 운영됐다. 당시 3회차에 진행한 카누를 타고 의암호 주변의 역사유적을 탐방하는 프로그램이 가장
조선 시대 우두 사람들은 봉의산 자락으로 일을 보려면 배를 타야 했다. 1930년 7월 서울~춘천 간을 잇는 신연교가 건설되고 서울과의 거리가 3일로 가까워졌지만, 강원도 영서지역을 횡단하려면 아직도 난관이 많았으니 동쪽에서 흘러드는 소양강이 버티고 있었기 때문이다. 1930년대 춘천의 교통망은 서울에서 춘천, 인제를 거쳐 간성까지 가는 경성-오리진선과 김화에서 춘천, 홍천, 횡성, 원주를 거쳐 충주까지 가는 김화-충주선 2등 도로가 동서남북으로 관통하고 있었다. 1932년 7월 15일 김화-충주선에 포함되어 춘천의 남북을 잇는 소
신매대교를 건너 우측으로 북한강을 끼고 가다 보면 밭 사이에 덩그러니 서 있는 석탑이 하나 보인다. 석탑이 위치한 마을 이름(춘천시 서면 서상리)을 따서 ‘서상리삼층석탑’이라 불린다. 엄황이 편찬한 《춘천읍지》와 일제 강점기에 편찬된 《조선환여승람》에는 양화사(楊花寺)라는 절이 서면 서상리 양화(楊花) 언덕에 있었는데 절은 사라지고 석탑만 남아 있다고 기록되어 있다. 이 기록을 토대로 ‘양화사지삼층석탑’이라고도 불린다. 1971년 12월 16일에 강원도 유형문화재 제16호로 지정되었다. 전체적으로 단아하고 안정된 모습을 갖춘 석탑으
봉의산 중턱의 강원도청, 서면 방동리의 신숭겸 묘역, 우둣벌 한쪽에 솟아 있는 우두산, 북산면 물로리의 한천자묘. 이들의 공통점은 전국적으로도 유명한 명당이란 점이다. 춘천엔 예로부터 중앙에서 힘깨나 쓰던 인물들의 무덤이 많았다. 소양강, 북한강과 아기자기한 산들이 조화를 이룬 배산임수의 지형에 더해 서울에서 수로를 통해 비교적 쉽게 접근할 수 있는 입지조건을 갖추었기 때문이다. 이 중 하나가 바로 서면 안보리에 있는 청풍부원군 김우명의 묫자리다. 조선 18대 임금인 현종의 왕비이자 숙종의 모친이 명성왕후인데, 이 명성왕후의 아버지
1939년 경춘철도가 생기기 이전에는 서울에서 춘천으로 들어오는 길은 대략 두 갈래였다. 서울에서 배를 타고 북한강 물길을 따라 거슬러 올라오거나, 괴나리봇짐을 둘러메고 두 다리에 의지하여 뚜벅뚜벅 걷는 것이다. 걷다 보면 큰 난관에 봉착하는데 마석고개, 가평고개, 석파령이 준엄하게 버티고 있었기 때문이다. 마지막 석파령을 넘어도 한고비가 남아있는데 북한강과 소양강이 합류한 큰 강줄기가 가로막고 있어 나루에서 배를 타지 않으면 건널 수 없었다. 춘천사람들은 이 강을 옛날 신관 사또가 부임할 때 군민이 마중 나왔다고 하여 신연강(新淵
위봉문(威鳳門)과 더불어 강원도청 자리의 역사성을 보여주는 건물이 조양루(朝陽樓)이다. 정면 3칸, 측면 2칸 규모의 팔작지붕에 누각 아래로 삼문(三門)을 낸 전형적인 문루(門樓)의 형태로, 1971년 강원도 유형문화재 제2호로 지정되었다. 최초 건립연대에 대해서는 이견이 있으나 1890년 춘천관아에 이궁(離宮)을 설치할 때 함께 건립되어 이궁의 문루로 사용된 것은 확실하다. 일제강점기에는 강원도청의 정문으로 사용되었으나, 지형이 좁고 춘천읍이 너무 번잡하다는 다소 황당한 이유로 1938년 우두산에 강제로 옮겨졌다. 이 과정에서 삼
강원도청 광장에서 소양로 현대아파트 방향으로 가다 보면 성당 표지판이 보인다. 성당은 봉의산 기슭에 자리 잡고 있는데 나무숲에 가려 시야에 잘 들어오지 않는다. 60년이 넘는 세월을 그 자리에 있었건만 웅장한 건축에 뾰족 솟은 종탑이 없어서일까, 천주교 신자가 아니면 그곳에 오래된 성당이 있는 줄 알지 못한다. 등록문화재 제161호로 지정된 소양로 성당(모수물길 22번길 26)이다.1945년 광복 이후 춘천교구 본당인 죽림동 성당은 신도 수가 나날이 늘어갔고 새 본당이 필요했다. 이에 분당을 계획하고 소양로에 있던 죽림동 본당 공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