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5년 전 1980년 4월 정선 사북 동원탄좌 노동자들의 절규에 가해진 국가폭력
전두환 신군부, 약속 뒤집고 무더기로 검거해 갖은 고문에 감옥살이까지
10월 29일, 다큐 ‘1980 사북’ 개봉…“진상규명·명예회복·피해보상 이뤄져야”
오는 27일, 춘천 시민단체 공동 상영회…저녁 6시 30분 춘천CGV 5층

1980년 4월, 광주 이전에 사북이 있었다.

“경찰이 사람을 죽였다.”

화면은 시커먼 탄광촌을 배경으로 분노에 찬 광부들의 모습으로 가득하고, 무장한 경찰 병력의 출동과 하늘을 나는 헬리콥터가 긴장감을 더한다. 계엄군이 들이닥친다는 소문에 “우리도 이제 죽기 살기로 싸울 수밖에 없다”는 비장한 말 한마디가 탄식처럼 흐른다.

1980년 봄, 5월 광주보다 한 달 전 강원도 정선군의 탄광촌 사북에서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일까?

1980년 4월 21일, 인구 2만의 사북 탄광촌은 삽시에 혼돈의 도가니로 빠져들었다. 당시 동원탄좌 사북광업소 광부들은 어용노조 이재기 지부장의 사퇴를 요구하며 농성하던 중이었다. 불법과 편법으로 지부장에 다시 선출된 이재기는 회사와 경찰의 노골적인 비호 아래 회사 측에 붙어 광부들의 등골을 빼먹으며 권세를 휘둘렀다.

광부 4명을 치고 달아난 경찰 지프. 경향신문, 1980.04.24.
광부 4명을 치고 달아난 경찰 지프. 경향신문, 1980.04.24.

광부들이 농성을 벌이자 경찰이 출동했고 충돌 과정에서 경찰 지프가 광부들을 들이받는 사건이 발생하면서 사태는 걷잡을 수 없이 확대됐다. 광부들의 투석에 경찰은 최루탄으로 응수했고, 피를 흘리며 쓰러지는 동료를 본 광부들은 눈이 뒤집혔다.

4월 22일, 경찰은 600여 명의 병력을 투입했지만, 6천여 명으로 불어난 광부들과 가족들을 막을 수 없었다. 경찰은 퇴각했고, 파출소와 예비군 무기고 및 화약고 등을 점거한 광부들은 안경다리를 경계로 바리케이드를 치고 외부 진입을 막았다.

광부들의 저항에 퇴각하는 경찰들. 동아일보 1980.04.24.
광부들의 저항에 퇴각하는 경찰들. 동아일보 1980.04.24.

광부들은 이재기의 아내를 붙잡아 기둥에 묶거나 도주하던 이재기를 붙잡아 폭행했다. 경찰과 충돌하는 과정에서 경찰 한 명이 사망하는 일도 벌어졌다. 그러나 무기를 확보한 광부들은 이를 철저히 관리하며 자체적으로 규찰대를 조직해 치안을 유지했다.

사태가 험악해지자 정부와 회사 측이 협상에 나섰다. 광부들은 이재기의 사퇴 및 임금 인상과 함께 시위 가담자를 처벌하지 않겠다는 약속을 요구했다. 공전을 거듭한 끝에 이원갑 등 지도부는 회사와 11개 항에 합의하고 해산했다.

광부들 진압을 위해 투입된 경찰 병력. 경향신문. 1980.0424.
광부들 진압을 위해 투입된 경찰 병력. 경향신문. 1980.0424.

그러나 이희성 계엄사령관 명의로 “일체 처벌하지 않겠다”던 약속은 지켜지지 않았다. 사태가 진정되자 계엄사는 합동수사단을 설치하고 대대적인 검거 선풍을 일으켰다. 주동자 이원갑과 신경 등을 비롯해 광부와 부녀자들 200여 명이 연행돼 물고문과 전기고문에 성고문까지 상상하기 어려울 정도로 심한 고문을 당했고, 군사 재판에 넘겨져 실형을 선고받았다.

부녀자들까지 대거 검거된 까닭은 사북항쟁에서 광부의 아내들이 맹활약을 벌였기 때문이었다. 남편들이 갱도나 뒤쪽에 있을 때면 부녀자들이 앞장서서 머리에 수건을 두르고 “내 남편 살려내라”, “배고파 못 살겠다” 등 절규하며 경찰들과 맞섰다. 돌을 나르고 바리케이드를 쌓은 것도 대개 여성들이었다.

계엄사의 보도 통제로 일절 기사를 내지 않던 언론들은 24일 일제히 “유혈”, “폭력”, “난동”, “무법”, “공포” 등의 선정적인 단어를 동원해 대서특필을 쏟아냈다. 더러 사태의 배경과 원인을 다룬 분석 기사도 있었지만, 대개는 ‘광부들의 폭력 난동’ 이미지 덧씌우기로 일관했다.

신군부가 거짓으로 광부들과 합의한 뒤 언론들이 쏟아낸 헤드라인들. 위부터 시계 방향으로 조선일보, 동아일보, 매일경제, 경향신문.
신군부가 거짓으로 광부들과 합의한 뒤 언론들이 쏟아낸 헤드라인들. 위부터 시계 방향으로 조선일보, 동아일보, 매일경제, 경향신문.

당시 신민당 총재였던 김영삼"사북사태는 19년 장기집권의 부조리 노출된 것으로 한번은 거쳐야 할 진통"이라면서 "그러나 희생자를 내는 등 불행한 사태가 발생한 것은 유감"이라고 말했다.

또 다른 유력한 야당 지도자였던 김대중은 사태의 발단이 "구태의연한 노동정책, 반성 없는 기업주의 태도, 어용노조 간부들의 부패행위 등 세 가지로 분석된다"면서도 "대화를 통해 평화적으로 문제를 해결하지 않고 폭력화하는 것은 바람직하지 못한 일"이라고 밝혔다.

정상을 되찾은 사북 읍내 거리 풍경. 경향신문, 1980.04.25.
정상을 되찾은 사북 읍내 거리 풍경. 경향신문, 1980.04.25.

5월 광주보다 한 달 먼저 있었던 4월 사북. 당시 사북은 국내 최대 민영 탄광인 동원탄좌가 있던 곳이다. 고한이 별도 읍으로 분리되지 않았던 당시, 사북읍 전체 인구 5만여 명 중 사북리 인구 2만여 명의 4분의 1인 5천여 명이 동원탄좌 광부들이었다. 가족까지 합하면 사실상 사북리 주민 전체가 광부들 가족이었던 셈이다.

언제 죽을지 모르는 ‘막장’ 인생. 임금은 상대적으로 높아 겉으로는 호황을 누리는 듯했지만, 광부들의 삶은 처참했다. 광부들은 군대식 통제와 감시 아래 기본급 없이 캐낸 석탄량에 따라 임금을 받는 '도급제'로 일하며 언제 갱도가 무너져 죽을지 모르는 막장에서 과중한 노동에 시달렸다.

1980년대 중반 사북 탄광촌 골짜기를 가득 메운 광부들 사택 단지 모습. 사진=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1980년대 중반 사북 탄광촌 골짜기를 가득 메운 광부들 사택 단지 모습. 사진=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탄광촌 물가는 외지보다 30~40%나 비쌌다. "월급 받아 쌀 사고 연탄 사면 남는 게 없다"는 말이 나올 정도였다. 이런 가운데 어용노조는 광부들을 대변하기보다는 오히려 회사의 이익을 대변하며 광부들을 감시하고 쥐어짰다.

이원갑 등을 중심으로 광부들은 이처럼 오랫동안 자행된 탄광촌의 불합리와 부조리에 저항하는 과정에서 무법·폭력·난동의 주동자로 낙인찍혀 고문과 감옥살이에 이어 수십 년간 고통스런 삶을 이어가야 했다.

1980년 '서울의 봄' 국면에서 터져 나온 사북항쟁은 1979년 10월의 부마항쟁과 1980년 5월의 광주민주항쟁을 잇는 중요한 연결고리다. 사북항쟁은 "인간답게 살고 싶다"는 광부들의 절규를 국가가 무자비한 폭력과 고문으로 짓밟은 사건이다.

지난달 29일, 사북항쟁을 다룬 다큐멘터리 영화 ‘1980 사북’이 개봉됐다. 정선지역사회연구소 황인욱 소장의 제안에 따라 제작에 나선 박봉남 감독은 고민이 많았다고 했다. 경찰관 사망이나 이재기 지부장 아내 폭행 등 사북항쟁의 또 다른 그림자 때문이었다.

왼쪽부터 박봉남 감독, 황인욱 정선지역사회연구소장, 사북항쟁 당시 중심 인물이었던 이원갑 씨.
왼쪽부터 박봉남 감독, 황인욱 정선지역사회연구소장, 사북항쟁 당시 중심 인물이었던 이원갑 씨.

이 영화는 제작에 5년이 걸렸는데, 편집에만 2년이 걸렸다고 한다. 사북항쟁을 겪은 이들의 증언이 너무나 괴로웠기 때문이다. 박 감독은 한 언론에서 “화면을 보는 것만으로도 고통스러워 편집을 한 달간 쉬기도 했다”고 밝혔다.

지난 19일, 영화인 318명이 이 영화의 개봉을 계기로 사북향쟁에 대한 정부의 사과와 직권조사 등 필요한 구제 조치를 촉구하는 성명을 발표했고, 21일에는 사북항쟁 45주년 행사에서 김민석 국무총리는 영상 축사를 통해 사북항쟁을 "공권력에 의한 심각한 인권침해"라고 규정하며 "진상 규명과 피해자 명예회복, 보상이 반드시 이뤄져야 한다"고 밝히기도 했다.

춘천에서는 오늘 27일 저녁 6시 30분, 춘천CGV에서 강원민주재단·춘천시민연대·춘천여성민우회·춘천촛불행동이 공동으로 주최하는 공동체 상영이 예정돼 있다.

‘영화사 느티’가 제작한 이 다큐멘터리는 2024년 DMZ국제다큐멘터리영화제 한국 경쟁 장편 대상과 국제영화비평가연맹상을, 2025 EBS 국제다큐영화제 심사위원 특별상을 받았다.

전흥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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