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복궁이 중건된 지 환갑이 되는 1927년, 차상찬은 억만 세월 수도의 정궁으로 남아 있기를 기원한 대원군의 헛된 꿈을 비판하며 망국의 아픔을 얘기하고 있다. 지금도 끊임없이 건물을 지어대는 탐욕을 경계하며 함께 경복궁 이야기를 들어보자. 1927년 1월 1일 발간된 《별건곤》 제3호에 “200만 명의 일꾼들, 팔백만 원의 국민재산, 회갑을 맞는 경복궁, 백성들의 원성을 산 대궐과 대원군 이야기”라는 제목으로 실린 글이다.지금까지 전해지는 옛날 노래“삼각산 제일봉에 봉학이 넌즈시 앉았구나. 봉의 등에 터를 닦고 학의 날개에 집을 지
일제 강점기 시대 조선, 남편 될 사람의 사진만 믿고 하와이까지 시집가는 여성들이 있었다. 그녀들은 대부분 10대, 20대 어린 나이로 이들을 ‘사진 신부’라고 한다. 그녀들과 사진결혼을 하는 사진 속 남자들은 1903년부터 1905년까지 하와이 사탕수수 농장에 노동자로 건너간 대한제국 최초의 이민자들이다. 이들은 신분에 따른 차별, 멸시, 기울어져 가는 조선의 부패, 외세의 침입, 어떻게도 살아내기 힘든 조선 땅보다야 낫겠지 하는 마음으로 ‘기회의 땅 하와이’를 선택했다. 소설 《알로하, 나의 엄마들》은 조선인 농업 이주 노동자들
소양로4가 비어 있던 낡은 양옥집 2층에 생기가 돌기 시작했다. 이른 아침, 2층 테라스에 모인 시민들은 무용가의 몸짓을 따라 하며 음악에 맞춰 춤을 춘다.낡은 빈집이었던 이곳은 춘천문화재단의 커뮤니티 거점공간 시범사업의 일환인 ‘전환가게’ 1호 ‘당신의 들판’이다. 시민에게 춤을 가르치는 사람은 입주작가 김동일 무용가이다.춘천문화재단은 커뮤니티 거점공간 시범사업으로 ‘인생공방’, ‘전환가게’, ‘모두의 살롱’을 조성하고 있다. 빈집이 지역문화예술 거점공간으로 변신하여 시민커뮤니티 활성화와 예술가의 자생을 도모한다.약사천 수변공원
올해 환갑을 맞은 팔팔한 청춘들이 특별한 전시회를 연다. 지역의 예술과 언론 그리고 사회 공직의 기해생들이 모여 그림과 서예, 책, 사진 등 각자의 작품을 선보인다. 권매화·김대영·박태원·백은주·육동한·윤혜숙·이상돈·이형재·허남욱·허미순·허인구·황선희 등이 참여했다.무료 / 010-6438-2256박종일 기자
‘도시재생을 꿈꾸는 사람들’은 교동, 근화동, 소양동, 약사명동의 옛 기억을 소중히 간직하고 있는 사람들을 만나 과거의 조각을 모으고, 오래된 도시에 다시 활력을 불어넣을 수 있는 가능성을 가늠하는 코너입니다. 이 코너는 춘천시 사회혁신센터와 함께합니다.서울에서 양복 만드는 실력을 나름대로 인정도 받았고 나이도 들고 해서 누님에게 50만원을 빌려 맞춤전문복점을 차리려고 왔어. 요선동에 ‘리버티’라는 이름으로 작은 가게를 냈지. 와서 보니 양복점은 벌써 몇 개 있더라고. 그래서 맞춤전문복점을 열었어. 처음에 명동에서 육림극장 올라가는
군인 - 대부분은 남자였고 한시적이었지만, 인류의 역사를 통틀어 가장 많은 수의 인간들이 종사했던 ‘직업’이다. 인류의 역사는 곧 전쟁의 역사였고, 그 전쟁의 역사에 동원된 자들은 시대와 장소에 예외가 없었다. 때로는 소명의식을 가지고 자원을 하거나 돈벌이의 수단으로 뛰어든 경우도 있었지만, 억지로 전장으로 끌려가거나 언제든 끌려갈 준비를 하고 있던 게 대부분이었다. 그 배경에는 정의나 애국심 같은 거역하기 힘든 ‘명분’이 방울뱀처럼 꼿꼿이 머리를 세우고 있었고, 그것으로부터 고개를 돌리는 순간 달려드는 혹독한 ‘처벌’은 진짜 방울
오랜만에 모든 가족이 모였다. 서로서로 또래끼리 어울려 안부 묻는 모습이 참으로 정겹다. 환갑행사 끝나고 큰시숙님께서 하신 덕담을 가슴에 담는다. 가족이란 서로서로 배려가 필요하고, 배려를 하다보면 믿음이 생기고, 믿음이 생기면 사랑이 생기고, 사랑이 생기면 사는 것이 행복해지는 것이다. 환갑잔치, 사랑잔치였습니다.권인숙(석사동)종이비행기 사연 보내실 곳* 이메일 : chunsaram@daum.net* 카카오 톡 ID : chunsaram11(이충호 편집위원 개인톡으로 연결됨)(카톡 친구찾기에서 위 ID를 검색하시면 찾을 수 있습니
“자동차 너 주마. 명의 변경 해가라.” 낡은 차를 애지중지 아껴 타던 아버지께 아들과 며느리가 칠순 선물로 새 차를 사 드렸을 때 말할 수 없이 기뻐하셨던 모습이 떠오른다.그러나 걷기를 좋아하는 아버지의 2012년형 차의 주행거리는 4만7천Km로 여전히 깨끗한 새 차 그대로다. 주행거리 20만km를 넘긴 딸의 차가 늘 마음에 걸렸던 아버지는 면허증을 반납하기로 결정하고, 차를 선물한 아들 내외에게 전화를 하셨단다. “내 차 너의 큰누나 주련다.” “아버지! 저희가 아버지께 선물로 드린 것이니 어떻게 하시든 아버지 뜻이면 저희는 좋
백세시대다. 환갑잔치가 사라진 요즘, 육십이라는 나이는 인생 후반부 청년기에 해당된다. 최근 서점가의 풍경도 달라졌다. 어르신들의 출판이 대세를 이룬다. 이들 중 베스트셀러 반열에 든 책들도 여럿이다. 신년 책방 나들이를 갔다가 《꿈이 있으면 늙지 않는다》라는 제목의 책에 손이 갔다. 정년은퇴 이후 제주도에서 커피농사를 지으며 시니어 스타트업으로 성공한 이야기다. ‘꿈’과 ‘희망’이 마치 청년들의 전유물인양 여기는 틀에서 벗어나 또 다른 도전을 시도하는 시니어들에게 맞춤한 내용이다. 우리 지역 양양 97세 산골 할머니의 일기 또한
지난 5월 27일, 강촌노인요양원에서 고 원응상 씨가 별세했다. 향년 85세. 고인은 일제강점기인 1933년 춘천 남면 후동리에서 출생했다. 18세가 되던 해 남산초등학교를 졸업하고, 바로 개교한 창촌중학교에 입학해 1회로 졸업했다. 졸업 후 고향에서 농사를 짓던 고인은 1968년 서울로 이주해 수유동에서 막노동을 하다 조경기술을 익혀 조경사로 일하다 은퇴했다.고인의 2남인 원용석 씨는 고인에 대해 “어머니와 우리 4남매는 늘 끼니를 걱정해야 하는 삶이었지만 가정은 그늘진 곳 없이 화목했다”며 “부친께서는 친척들이 서울로 삶의 근거
일주일간의 노동으로 몸도 마음도 파김치가 된 주말 아침. 소파에 널브러져 오늘 하루 맘껏 게으름을 피워보리라 마음먹고 있던 그때, 미처 소파에 엉덩이도 걸치기 전에 “엄마아~” 딸의 혀 꼬부라진 소리가 들렸다. 대개 엄마들은 자식들이 부르는 같은 발음기호의 ‘엄마’ 소리에도 수많은 차이가 있다는 걸 안다. 오늘의 ‘엄마’는 뭔가 또 귀찮은 요구를 들어줘야 하는 소리란 걸 직감적으로 알았다. 난 ‘오늘도 틀렸구나’ 생각하며 딸아이와 옷을 사러 명동으로 나갔다.나는 이전에도 옷을 산 적이 있는 한 매장으로 불쑥 들어가 휘휘 건성으로 둘
무술년 새해가 밝았다. 무술년은 딱히 어떤 이유인지 정확히 밝혀지지는 않았지만, 마치 특별한 의미가 있는 것처럼 인식된 이른바 그 ‘58년 개띠’가 환갑이 되는 해다.추측컨대 한국전쟁이 끝난 이후 약 10년 사이에 태어난 베이비부머 세대의 중간쯤에 해당하는 연령으로 교실문제 등 갑작스런 인구증가를 가장 확실하게 인식시켜 준 때문이 아닐까 생각한다. 그렇게 본다면 이제 한국사회에서 가장 많은 수를 차지했던 한 연령대가 현역에서 상당부분 물러난다는 이야기가 된다. 한국사의 가장 암울했던 유신시기를 청소년으로 겪고, 광주학살이라는 비극으
“정권에 부역하고 완장질 하는 놈들은 좌든 우든 똑같아. 노조 간부라고 어깨에 힘주고 다니는 꼴, 정말 역겹더라.”아주 가까운 형이 베이징 특파원 생활을 할 때 전해 들었던 약간 충격적인 얘기. 여기서 정권은 노무현 정권이었고, 방송사는 정부의 입김이 가능한 공적 소유구조를 갖춘 곳이다. 나는 그 형의 태생적인 반골(反骨)기질을 잘 알고 있는 터여서 기계적 중립이나 운운하고, 먹물근성으로 점철된 전형적인 언론지식인의 개인적 한풀이 정도로 이해했다.2014년 4월 16일. 생명의 존엄과 권력의 영속화 앞에 갈등하던 언론은 기꺼이 ‘기
할아버지 환갑날 찍은 사진 속 내 모습은 시무룩하고 머리는 헝클어져 있다. ‘좋은 날, 계집애가 머리를 빗으면 부정 탄다’는 할머니의 만류로 머리손질을 못한 탓이다. 나를 미워한다고 생각해본 일 없는 할머니의 한마디는 당황스러웠다. 부스스한 몰골로 사람들 앞에 나서기는 싫었지만, 할머니 말대로 나쁜 일이라도 생길까 몰래 빗을 용기도 내지 못한 채, 여덟 살 계집애는 종일이 우울했다.새해 첫날은 말할 것도 없고 아기 낳은 집, 굿하는 집, 결혼식이 있거나 장사 난 집이 암만 궁금해도 남자아이들처럼 대놓고 구경하기란 쉽지 않았다. ‘사
강원도 정무부지사, 강원발전연구원장 등을 역임한 남동우 씨가 그림 전시회를 열었다.환갑을 맞아 세계를 일주하고 그 여행기를 엮어 《황금빛 세상으로 가는 길》이라는 책을 펴낸바 있는 남 씨는 2013년 계간 《문학과 의식》에 단편소설 ‘챔피언’이 당선되며 등단했다.2015년도에 실화 장편소설 《소양강》을 발표하기도 한 그가 이번에는 화가로서의 재능을 선보여 보는 이들을 놀라게 하고 있다.지난달 24일부터 오는 14일까지 강원연구원(전 강원발전연구원) 1층 갤러리에서 전시되는 남동우 개인전에는 그가 환갑 여행으로 다녀온 23개국 123
한국전쟁 당시 황해도 옹진 출신의 열여섯 살 소년병이 있었다. 그 소년병은 전쟁의 와중에 반공포로가 됐다. 몇 해가 지난 후 청년이 된 소년은 결혼을 했다. 아들이 태어난 뒤 6개월만에 그는 다시 군에 입대한다. 그리고 1년 정도 지난 뒤인 어느 겨울, 그는 누군가 등 뒤에서 쏜 총에 왼쪽 어깨 아래를 관통당하는 총상을 입고, 후송병원으로 옮겨진 지 38일만에 사망한다. 1959년 1월 3일의 일이었다. 그에게는 아내와 어린 아들이 있었지만 군에서는 사망 1주일 전까지 이런 사실을 통보하지 않았다. 군에서는 사망하자마자 다음날 연락
마당 너른 집을 동경하는 사람이 참 많다. 많은 상상을 펼칠 수 있는 마당이란 공간이 우리에게 주는 느낌 때문이다. 마당에서는 환갑잔치, 결혼잔치, 탈곡, 풀 썰기 등을 비롯해, 여름날 한창 더위가 기승을 부릴 때는 모깃불을 피워놓고 멍석 위에 앉아 온 가족이 강냉이, 감자, 호박으로 끼니를 때우던 정겨운 생각도 불러일으킨다. 어디 그뿐이랴. 모든 식구가 방으로 들어가고 나면 마지막으로 멍석을 말기 전에 은하수가 쏟아지는 하늘을 바라보며 오누이가 별 세기 내기를 했던 아름다운 추억도 간직한 곳이다. 마당은 정말 유용한 공간이다.설미
작고 보잘 것 없어도 사람을 만나면 아름답게 느껴지는 마을이 있다. 이런 마을에 가면 무엇보다 인심이 후하다. 어쩐지 그 옛날 우리 할아버지, 할머니, 삼촌, 고모들과 함께 살던 대가족이 그리워지기도 한다. 먹을 것, 입을 것 없어 힘들어도 따뜻했던 시절이었다. 그러나 이제는 오밀조밀 흥부네 방 같은 옛 풍경은 찾을 수 없다. 춘천 남산면 ‘오양골’에 가면 그렇게 옛 시절이 생각난다.오양골은 강촌에서 둥덜리강을 따라 백양리 방면으로 가다가 왼쪽에 있는 작은 골짜기 마을이다. 물론 이곳에는 오양골만 있는 것이 아니다. ‘발래골’, ‘
10년 가까이 대학이라는 공간에서 학생들과 동고동락하면서도 채워지지 않는 무엇인가가 있었다. 특히나 경영학의 관점에서 주된 관심사가 작동하는 일상은 빡빡하기까지 했다. 그러던 중 만나게 된 협동조합 ‘교육과나눔’은 필연이었을까?‘사회적경제’라는 이름으로 불리는 여러 주체들과 생각들을 배우기 시작하면서 다시 걸음마를 걷는 기분이었다. 이렇게 걷는 연습을 하는 것으로 뛸 수도 있을까 하는 의구심도 함께였다. 항상 수치화된 결과로 성공과 실패를 단정하고, 효율과 경쟁에 대해서만 고민하기 바빴던 삶의 방향이 새로운 경계를 넘어선 양 시원한
두보는 이란 시에서 “사람이 칠십까지 살기가 예로부터 드물었다(人生七十古來稀)”고 했다. 그러나 오늘날 환갑은 당연한 것으로 생각해 인생차례로 여기지도 않고 있으며, 팔순을 살아도 오래 살았다고 보지 않는 실정이다. 비약적으로 발달한 과학문명과 의료기술로 인한 인간수명의 연장은 더욱더 백세시대를 가능케 하고 있다.베이비붐 마지막 세대인 50대 초중반 사람들은 사회에서 중추적인 역할을 하고 있으면서도 여전히 어른 대접을 받지 못하고 있는 것이 현실이다. 공자는 나이 오십을 천명을 아는 나이라고 했으니, 이른바 ‘지천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