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전적 글쓰기, 자아정체성 확립 과정이자 중요한 것 정의하는 가치평가의 과정"
부끄러운 순간을 마주 대하는 오늘의 의미란?
얼마 전 글쓰기와 관련된 자료를 찾으면서 오랜 시간 준비했음에도 결국 학위 심사에선 떨어졌던 석사학위 논문과 대학원 시절 제출했던 과제를 살펴봤다. 나는 대학원을 평점 만점으로 수료했지만, 이러저러한 사정으로 학위를 받지 못했다.
그때 그 시절 내가 쓴 연구논문과 과제를 살펴보니 여러 가지 감정이 올라왔다. 제일 먼저 드는 감정은 엄청나게 큰 수치심이었다. 학위논문 주제 선정과 진행을 매끄럽게 하지 못한 탓에 지도교수와 문제가 생기면서 학위를 받지 못한지라 나는 그 논문을 책장 한구석에 처박아 놓았다. 심지어 논문이 들어있는 한글 파일도 잃어버렸다.
그 논문을 다시 열어 읽어보니 교수와의 문제를 떠나서 뜬구름 잡듯이 참 못 썼다‘는 생각을 했다. 과제도 마찬가지였다. 그때는 ‘아주 잘했다’고 생각하면서 자신 있게 제출했던 것들인데 다시 읽어보니 부끄러운 수준이었다. 확 내던져 버리고 이불 속에라도 웅크려 숨고 싶은 마음이 들었다.
그러나 어쩌랴. 지금 내가 부끄럽고 화가 나는 감정을 느낀다 한들 과거로 돌아갈 수도 없고 결과를 돌이킬 수도 없는 노릇이다. 그때는 왜 그랬을까 생각해보니 삶의 격랑과도 같은 사건이 당시에 전개되고 있었다. 그렇다고 그때는 그 격랑을 물리칠 수도 없었다. 격랑 속에서 내 주변의 많은 일이 흐트러지기도 했지만, 후회한들 이미 벌어진 일은 돌이킬 수 없다. 이제라도 성찰하고 다시 바로 서는 수밖에 없다.
그래서 나는 오랫동안 묵혀 두고 방치했던 숙제를 더 열심히 하기로 마음먹었다. 지금 쓰고 있는 책을 잰걸음으로 쓰고, 내가 지닌 잔재주인 기록하기를 더 요령껏 해보기로 했다. 다시 공부하고 정리하면서 새로 쓰기를 하듯 나도 내 인생을 정리하기로 했다.
생애 첫 기억부터 시작하는 회고와 성찰
생애 첫 기억으로 거슬러 올라가 그때부터 지금까지 삶의 주요한 궤적마다 강렬하게 남아있는 인상을 글로 써서 한평생의 이야기로 엮는 것이 자서전 쓰기다. 내 인생에 대한 자전적 글쓰기는 살아온 삶과 인연을 회고하고 반성하는 글쓰기인데, 이는 곧 자기를 고백하는 과정이다.
고백의 과정이기에 자서전을 쓰는 것은 그리 간단한 일이 아니다. 누구나 가슴 속에 한두 개쯤 숨겨놓은 블랙홀 뚜껑을 열어봐야 하기 때문이다. 블랙홀이 없는 사람이 어디에 있으랴. 혼자만 알고 있는 수치스러운 어떤 순간, 가장 슬프고 고통스러웠던 순간, 다시는 돌이켜 떠올리고 싶지 않은 순간들이 우리의 가슴 깊은 곳에 블랙홀처럼 숨겨져 있다. 자전적인 글을 쓰다 보면 그 아픈 기억의 문을 열고 들여다봐야 한다. 블랙홀을 열어보고 우리는 한 번 더 수치와 슬픔을 느낄 수 있지만, 위로와 치유의 순간을 만날 가능성은 더 높다.
글쓰기는 자아정체성을 확립하는 영광스러운 과정
아우슈비츠 수용소에서 살아남았던 심리학자인 빅터 프랭클은 인간은 ‘의미’를 추구하는 존재라고 했다. 그는 "삶이 의미가 있는지 묻는 대신 매 순간 의미를 부여하는 건 우리 자신"이라고 말했다. 우리 가슴 속에 깊이 감춰진 블랙홀의 문을 열었을 때 우리가 생각해야 할 것은 ‘그래서 지금 무엇을 할 것인가’다. 다시 말해 쓰라린 기억을 끄집어 올린 순간, 과거의 기억과 그 기억을 바라보는 현재의 감정이 내게 가져다줄 의미를 찾아내는 것이 ‘지금, 여기에서(here & now)’ 할 일이다. 이러한 의미 부여의 과정을 거치면서 우리는 자기 정체성을 다시 확립할 수 있다.
‘노년기 자아통합감 증진을 위한 자전적 글쓰기 프로그램 효과 연구’(《한국노년학》, 2016)를 쓴 이광경과 주영아는 “회상을 통해 과거의 기억을 재구성하고 그것들을 글로 남긴다는 것은 개인적으로는 자기 자신의 삶에 대한 성찰이자 정체성 확립의 과정”이라고 했다.
캐나다의 철학자 찰스 테일러는 “자아정체성은 나에게 중요한 것과 중요하지 않은 것을 정의하는 가치평가의 기준을 제공해 내가 어떤 입장을 취할 수 있게 해 주는 지평”이라고 했다.
요컨대 자전적 글쓰기를 하면서 우리는 기억의 태엽을 과거로 돌려 과거의 순간을 다시 돌아보고, 성찰의 과정을 거쳐 오늘 다시 과거라는 시간의 의미와 지금 내가 바로 서서 가야 할 길을 재정비하게 되는 것이다. 즉 자아정체성을 확립하는, 찰스테일러의 말마따나 중요한 것을 정의하는 가치평가의 과정이 자전적 글쓰기 과정이며, 그 영광스러운 의미인 것이다.
김효화(기록작가/ 글잡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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