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은 섬이 아니다
“누구도 그 자체로 온전한 섬이 아니다. 모든 인간은 대륙의 한 조각, 대양의 일부이니 한 덩이 흙이 바닷물에 씻겨 내려가면 유럽 땅이 그만큼 작아지며, 곶이 줄어들거나 그대의 벗과 그대의 땅이 줄어들어도 매한가지이다. 누군가의 주음이 나의 생명을 감소시키는 것은 내가 인류와 하나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누구를 위하여 종은 울리는지 알려고 사람을 보내지 말라. 종은 그대를 위하여 울리는 것이니.” - 존 던(1572-1631)
페스트가 창궐하던 시기, 죽음에 이른 자들에게 위로의 말을 전하던 영국의 성공회 사제이자 시인인 존 던은 자신 역시 페스트에 전염돼 생사를 오가는 상황에서 ‘인간은 섬이 아니다’라는 기도문을 남겼다. 이 글은 먼 훗날 헤밍웨이의 소설 《누구를 위하여 종은 울리나》의 모티브가 되었다.
이 글의 의미는 인간은 섬처럼 홀로 있는 존재가 아니며 이 세계와 연결되어 있다는 것이다. 《누구를 위하여 종은 울리나》 역시 스페인 내전이라는 정치적 대립과 이념적 갈등이 수많은 사람을 죽음으로 몰아넣고 개인의 삶과 사랑을 파탄으로 내몰고 있음을 보여준다.
나의 세계를 관조하는 시간
‘치유 글쓰기’ 지난 시리즈에서 ‘인생 글쓰기는 내 인생의 기록을 넘어, 가족과 가문과 사회의 기록이고 역사’라고 한 바 있다. 그리하여 ‘내 인생의 연대표’를 통하여 역사 속 내 존재의 역사와 양상을 관찰하라고 하였다. 내 존재에 대한 관찰이라 함은 관조를 의미한다.
관조란 ‘사실이나 현상을 깊이 들여다보며 본질을 깨닫는 것’이라는 뜻이다. 불교에서는 ‘마음을 집중해 대상을 관찰하며 깨달음을 얻는 수행방법’에 해당하며, 문학적으로는 ‘대상을 감상하며 그 속에 담긴 의미나 미묘한 변화를 음미하는 태도’라고 정의할 수 있다. 요컨대 관조란 제3자의 관점에서 객관적인 눈으로 나의 세계를 차분히 성찰하는 태도로 들여다보는 것이다. 내 세계의 변화와 성장이 담고 있는 의미나 미묘한 본질적 변화를 꿰뚫는 것이다.
‘내 인생의 연대표’를 그리며 스스로 관조하다 보면 인생의 희비에 숨겨진 의미를 통찰하게 된다. 그렇다면 이제 ‘나는 이 글을 왜 써야 하는가’에 대해 생각해야 한다. 많은 이들이 종종 ‘내 인생을 책으로 쓰면 열 권은 나온다’, ‘나도 내 인생을 책으로 내고 싶다’는 희망을 드러낸다. 그럴 때 나는 묻고 싶다. 왜?
‘왜?’라는 질문에 ‘그냥!’이라는 답이 나온다면? 안 된다. 그냥 내 인생을 쓰고자 한다면 배는 산으로 가고, 그동안 열심히 쓴 몇 장의 글은 휴지조각이 되고 만다. 글쓰기를 시작하기에 앞서 질문해야 한다. 누구를 위하여? 무엇을 주고자? 어떻게 쓸 것인가?
‘그냥’ 쓸 거면 쓰지 말고!
글을 쓰려 마음을 먹었을 때는 가장 먼저 이 글을 읽는 대상에 대해 고려해야 한다. 스스로 치유하는 글쓰기를 혼자 하는 것이라면 구애받을 건 아무것도 없다. 다만 자기치유 글쓰기를 더 잘하는 방법을 잘 알고 솔직하게 자신을 들여다보는 글쓰기를 하면 더 좋다.
글을 쓸 때 대상을 고려하는 것은 무엇보다 중요하다. 나만 알아들을 수 있는 말로 쓴다면 혼자 방언하는 것과 다름없다. 나만 알고 있는 것을 타인은 결코 알 수 없다. 혼자 중얼거리는 것에 대해 타인이 그 감정과 상태, 상황을 이해할 리 만무하다. 글을 읽을 대상이 당신에 대해 아무것도 모른다는 점을 명심해야 한다.
내가 살아온 길을 정리하는 이유라면 무엇보다 나의 자녀와 손주와 이웃들이 볼 것이니 쉽고 솔직하게 써야 하며 기억에 남는 에피소드와 그로 인한 영향을 자세하게 담아내야 한다.
만약 업무를 하면서 익힌 전문적 노하우를 전수하고 공유하기 위해 책을 쓴다면 전문성을 뒷받침할 근거자료와 사례, 이미지가 충분해야 한다. 전문적 노하우를 담는 책이라면 차별성 있는 주제와 합리적인 논리 전개가 핵심이다. 따라서 주제와 글감 선정에 심혈을 기울여야 하며 글감을 뒷받침할 만한 객관적인 데이터를 다양하게 조사‧수집하여 적절하게 삽입해야 한다.
이처럼 글쓰기를 시작하기 전에 글을 쓰는 대상과 목적을 분명히 하고, 주제는 명료하게, 글감은 넉넉하게 준비해야 한다. 앞서 ‘내 인생의 연대표’를 그리면서 작성된 인생사의 주요 사건들은 핵심적인 글감이 된다. 연대표를 구체적으로 작성할수록 쓸 것이 풍부해진다는 말이다.
서두에서 꺼낸 ‘누구를 위하여 종은 울리나’를 다시 생각해보자. 인간은 섬이 아니다. 내 인생은 세계와 연결되어 있으며 역사의 한 가운데에 있다. 그래서 글을 쓸 때도 나에게, 혹은 이 세계에 던질 메시지가 무엇인지에 대해 숙고하면서 시작해야 한다.
김효화(기록작가/글잡이)
- [김효화의 치유 글쓰기] ④연대표를 채우며 기억의 타래를 풀자
- [김효화의 치유 글쓰기] ③사실을 바탕으로 감정을 넣고 가치를 발견하라
- [김효화의 치유 글쓰기] ②내 삶의 고통스러운 블랙홀을 열어라
- [김효화의 치유 글쓰기] ⓛ자가치유와 보상의 욕구
- [김효화의 치유 글쓰기] ⑥무엇을 쓸 것인가?
- [김효화의 치유 글쓰기] ⑧연상으로 만나는 인생의 어느 순간들
- [김효화의 치유 글쓰기] ⑨펜 끝에서 열리는 생각의 열매
- [김효화의 치유 글쓰기] ⑩진실한 글의 첫걸음
- [김효화의 치유 글쓰기] ⑪말하듯이 노래하고, 노래하듯이 쓰자
- [김효화의 치유 글쓰기] ⑫도입은 감각적으로…종결은 간결하게
- [김효화의 치유 글쓰기] ⑬풍성한 문단이 좋은 글을 만든다
- [김효화의 치유 글쓰기] ⑮인생이라는 단편소설집 쓰기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