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은 가래떡처럼 뽑히지 않는다
글 써서 밥 먹고 산 지 33년이 넘었다. 그래도 어렵다. 가장 간단하고 쉽다고 할 만한 인터뷰 원고 하나 쓰는 데도 정리할 시간이 필요하고, 책상 앞에 앉을 마음이 들게 나를 도닥여야 한다. 무슨 50년사나 100년사 같은 기관·단체의 역사서를 쓸 때면 칠흙 같이 어둡고 긴 동굴에라도 들어앉은 기분이 된다.
글이란 것은 가래떡 뽑듯이 기계로 쭉 뽑아져 나오지 않는다. 문장과 문단, 장과 부를 놓고 글을 쓰는 가운데에도 글의 위아래로 오르락내리락하며 덧붙이고 지우고 뒤바꾸는 과정을 숱하게 한다. 그러다 보면 지친다. 글쓰기를 직업으로 삼고 거의 매일 글을 쓰는 사람도 글을 쓰는 작업이 힘들다. 아니 무엇보다 두렵다.
왜 두려울까? 그것은 무엇을 써야 할지 정해지지 않아 막막할 때 더욱 그렇다.
글쓰기라는 바다로 나간 내 인생의 배
글쓰기를 권장하는 학자들은 ‘글쓰기는 신체 건강과 정신 건강을 증진시키고 긍정적 자아개념과 자존감을 높인다. 또한 사회적 의사소통 기술을 향상시키고 자기 경영 및 자기 점검의 도구로써 효과를 나타낸다’고 보고하고 있다(김현희 외,《상호작용을 통한 독서치료》,학지사, 2010.).
여기서 말하는 글쓰기는 자기 치유적 글쓰기를 말한다. 그런데 목적과 방향을 분명히 정하지 않은 채 글쓰기를 시작하면 신체 건강과 정신 건강을 증진하기는커녕 글 쓰다가 스트레스를 받아서 도리어 혈압만 올라간다.
목적과 방향을 분명히 하지 않고 글을 쓰기 시작하면 쓰는 도중에 ‘내가 지금 뭘 쓰고 있지?’, ‘이 다음엔 뭘 써야 하지?’ 라며 소위 ‘멘붕’ 상태에 빠지고 만다. 글쓰기라는 바다로 나간 내 인생의 배는 어디로 향해야 할지 몰라 자칫 풍랑을 만나 난파된다. 목적과 방향을 분명히 하고 그에 맞는 장비(글감)를 충분히, 그렇지만 딱 필요한 만큼만 갖추어야 드넓은 바다에서 목적지를 향해 순항할 수 있다.
요컨대 글을 시작하기에 앞서 어떤 목적을 가지고 무엇을 쓸 것인가를 분명히 하고 글쓰기를 시작해야 하며 그에 맞는 글감을 알맞게 준비해야 한다.
지난번 시리즈에서 대상과 목적, 주제와 글감을 정리하면서 글쓰기가 시작되어야 한다고 정리했는데, 그럼 이제 자신이 쓰고자 하는 책이 아래의 여러 책 중 어떤 종류인지 구분해 보자.
제목은 자기개발서인데 내용은 일기?
얼마전 지인이 본인이 쓴 책이라며 선물을 했다. 책의 제목은 특정분야에 대해 알려줄 것 같은 자기개발서였다. 그러나 책을 읽어보니 그의 탄생부터 시작해서 험한 고난을 거쳐 특정분야에서 성공하기까지 과정을 담은 자서전에 가까웠다. 특정분야에 대한 지식이나 경험 전달은 단 한 줄도 없었다.
그런데 제목은 마치 자기개발서처럼 달아놓으니 책의 정체성이 모호했다. 물론 무엇이 되었건 자기의 책을 낸 것 그 자체만으로도 굉장히 훌륭하고 대단한 일이다. 하지만 ‘그냥’ 내가 가진 생각을 짜임 없이 펼쳐놓으면 책의 가치가 뚝 떨어진다. 독자가 ‘와~’하고 책을 들었다가 ‘엥?’하고 책을 내려놓길 바라는가?
지금 쓰는 글을 통해 ‘어떤 독자에게 무엇을 전달할 것인가’를 미리 기획하고 책을 쓴다면 훨씬 더 가치있으며 짜임새 있는 책이 탄생한다. 글의 얼개를 균형있게 짜고, 문장과 문단을 탄탄하게 지어 책의 가치를 높이는 것은 내 인생의 가치를 높이는 것과도 연결된다. 글의 목적과 방향을 분명히 잡고 철저하게 준비하면서 책을 짓는 것은 나의 내면과 외면을 아름답게 가꾸는 과정과 맥이 통한다.
책의 목적에 따라 절차가 다르다
10년 전 자서전 쓰기 교육을 할 때 A라는 분은 ‘아버지에 대한 그리움’을 책에 담고 싶다고 했다. 또 B라는 분은 ‘공무원 업무 노하우’를 전달하는 책을 쓰고 싶다고 했다. A는 ‘아버지에 대한 회고록’을 쓰고 싶은 것이고, B는 ‘자기개발서’를 쓰고 싶은 것이다.
자서전을 쓰고 싶다는 마음을 먹고 글쓰기 프로그램에 참여했지만, 사람마다 글쓰기의 목적과 방향은 완전히 다르다. A와 B가 같은 방법으로 글쓰기를 시작하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 조력자도 달라져야 한다.
A는 작가나 기획자에게서 글쓰기와 책 구성에 대한 조언을 들어 자서전과 회고록을 쓰는 것이 합리적이다. 반면 B는 자기의 지식을 잘 엮어 멋있게 책을 펴내 줄 출판사를 찾아가야 한다.
B는 자서전 쓰기를 배울 것이 아니라 자기가 갖고 있는 ‘특정 분야의 공무원 업무 노하우’를 상세히 정리하는 것이 우선이다. 그 노하우에 대한 글쓰기는 누군가가 쉽게 도울 수 있는 일이 아니다. 물론 박사 논문도 대필하는 마당에 돈이 많다면 수천만 원 들여 대필하면 된다.
자기개발서를 쓰고자 한다면, 오로지 자신만 알고 있는 노하우를 자기가 상세히 기술해야 하며 다 쓴 원고를 들고 출판사를 찾아가는 것이 순서다. “나는 기술적 노하우가 많은데 글을 쓸 줄 몰라서…”라고 한다면 책을 쓰는 꿈은 접어야 한다.
글쓰기는 하루아침에 잘되는 게 아니다. 내 노하우를 전달하는 책을 내고 싶다면? 그냥 무작정 써야 한다. 기술과 능력을 전달하는 글은 유려하지 않아도 된다. 내용이 출중하고 차별성이 있다면 목차를 비롯한 책의 얼개부터 비문이나 장문 등 문장과 문단 짜임 등은 출판사에서 함께 수정하는 과정을 거친다.
나는 어떤 목적을 가지고 무슨 내용을 담은 글을 쓸 것인가? 그것부터 스스로 정리해야 진정 ‘나를 위한, 나를 치유하는 글쓰기’라는 배가 순조롭게 출항할 수 있다.
김효화(기록작가/글잡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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