춘천의 한 골목에서 사라진 것은 건물만이 아니었다. 오랜 세월 쌓인 이웃과의 인사, 골목길 벽화, 그리고 도시만의 이야기까지 함께 지워졌다.
재개발 현장이 된 중앙시장 인근 골목
1960년 개설된 춘천 대표 상설시장인 중앙시장 인근의 한 골목길. 불과 몇 년 전만 해도 이곳에는 30년 넘게 자리를 지켜온 분식집과 구두 수선방, 헌책방이 늘어서 있었다. 방학이면 학생들이 떡볶이를 사 먹고 장을 보러 나온 어머니들이 오랜만에 만난 이웃과 안부를 나누던 곳이다. 골목골목을 따라 걸으며 숨은 벽화나 조형물을 찾아보는 재미가 있었던 이 일대도 지금은 '도시환경 정비사업구역'이라는 팻말과 가림막으로 둘러싸였다.
재개발 공사가 시작되면서 오래된 간판과 벽화는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골목길을 따라 걷던 사람들의 발걸음도, 담장 너머로 들려오던 생활의 소음도 모두 멈췄다.
"40년 살았는데 이웃을 다시 볼 수 있을까요?"
재개발 지역에 살던 70대 주민 김모 씨는 "이 골목에서만 40년을 살았다"며 "새 아파트로 들어가면 편리할지는 몰라도 매일 눈인사 나누던 이웃을 다시 볼 수 있을지 모르겠다"고 말했다.
이 말은 재개발이 단순히 낡은 집 한 채를 허무는 것이 아니라는 점을 보여준다. 골목이 품고 있던 관계와 기억, 그리고 일상의 소소한 행복까지 함께 사라진다는 사실을 드러낸다. 새로 지어진 아파트 단지는 분명 더 따뜻하고 더 넓을 것이다. 하지만 수십 년간 쌓아온 이웃과의 정은 어떻게 다시 만들어낼 수 있을까.
획일화되는 도시 풍경
춘천시 곳곳에서는 낡은 주택과 재래시장이 사라지고, 그 자리에 높은 아파트 단지와 대형마트, 전국 어디서나 볼 수 있는 프랜차이즈 카페들이 들어서고 있다. 문제는 어디를 가나 똑같은 브랜드 간판, 똑같은 상가 배치라는 점이다.
2019년 강원연구원이 발표한 '춘천 원도심 재생 연구' 보고서에서 춘천시민들을 대상으로 한 설문조사 결과, 응답자의 63%가 "도시의 개성이 사라진다"는 점을 재개발의 가장 큰 문제로 꼽았다. "어디가 춘천인지 모르겠다"는 한 시민의 말처럼, 도시는 점점 자기만의 색깔을 잃어가고 있다.
다른 선택을 한 도시들
모든 도시가 춘천과 같은 길을 걷는 것은 아니다. 서울 성수동은 낡은 공장들을 무작정 허물지 않고 리모델링을 통해 카페와 갤러리로 재탄생시키면서, 지역 고유의 산업 흔적을 고스란히 살려냈다. 덕분에 성수동은 젊은 세대들의 발길을 끌어들이는 문화 공간으로 거듭났다.
부산 감천문화마을은 더욱 인상적인 사례다. 1950년대에 태극도 신도들과 6·25 전쟁 피난민들이 모여서 이루어진 이곳은 재개발 대신 2009년부터 '보존과 재생'을 바탕으로 진행된 도시재생의 일환으로 부산지역의 예술가와 주민들이 합심해 담장이나 건물 벽에 벽화 등을 그리는 '마을미술 프로젝트'가 진행되어 부산의 대표적인 관광지로 자리를 잡았다. 2009년 5월 문체부의 공공미술 프로젝트에 선정되었고, 2010년 2월에는 문체부의 '2010 콘텐츠융합형 관광지원사업'에 선정되기도 했다.
이런 사례들이 주는 교훈은 명확하다. 무조건적인 철거와 신축이 능사가 아니라는 것이다. 골목과 로컬 가치를 존중하면서도 도시를 발전시킬 방법이 분명 존재한다는 점이다.
골목이 주는 진짜 가치
그렇다면 골목은 도시에 무엇을 주는가. 골목은 단지 집과 집 사이를 잇는 길이 아니다. 그곳에는 이웃과의 관계가, 지역만의 생활문화가, 그리고 세대를 잇는 기억이 켜켜이 쌓여 있다.
춘천중앙시장에서는 한국전쟁의 흔적이 남아 있었는데, 바로 ‘양키시장’의 역사 때문이다. 한국전쟁 이후 미군 부대가 춘천 인근에 주둔하면서 미국 군인들이 쓰는 물건들이 시장으로 흘러들어오기 시작했다. 이처럼 골목과 시장은 단순한 상업 공간이 아니라 도시의 역사와 기억을 담고 있는 문화적 공간이다.
골목길에서 자라난 아이는 어른이 되어서도 그 동네 냄새를, 골목 모퉁이 구멍가게 할머니의 따뜻한 미소를 기억한다. 골목은 그 자체로 도시의 정체성이고, 사람들에게는 '고향'이라는 감정을 선사하는 공간이다.
골목이 사라진다는 것은 단순한 풍경의 변화가 아니다. 도시가 자기만의 이야기를, 주민들이 품고 있던 애착을, 그리고 다음 세대에게 물려줄 기억을 잃는 일이다.
공존의 길을 찾아서
춘천이 지금 직면한 딜레마는 명료하다. 더 편리한 도시를 만들 것인가, 더 특별한 도시로 남을 것인가? 하지만 진짜 해법은 둘 중 하나를 선택하는 것이 아니다. 편리함과 로컬성을 함께 담아내는 제3의 길에 있다.
오래된 골목을 지우는 대신, 그곳을 다시 살려내는 상상력이 필요하다. 낡은 건물은 안전하게 보수하고, 골목길은 걷고 싶은 길로 만들며, 오래된 가게들은 새로운 활력을 얻을 수 있도록 돕는 것이다. 그래야 춘천은 단순히 ‘살 만한 도시’를 넘어 ‘살고 싶은 도시’로 거듭날 수 있다.
재개발의 굴착기가 또 다른 골목을 향해 움직이기 전에 우리는 멈춰 서서 물어야 한다. 정말 이 골목이 사라져야 하는가? 이곳에 담긴 이야기들을 다른 방식으로 지켜낼 수는 없는가? 골목이 사라지면 도시의 기억도 함께 사라진다. 그리고 기억을 잃은 도시는 결국 어디에도 없는, 그 누구에게도 특별하지 않은 공간이 되고 만다. 춘천의 선택이 주목받는 이유다.
김세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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