춘천 명동과 운교동. 한때 ‘춘천 최대의 극장’으로 불리던 육림극장 건물은 지금도 그 자리에 남아 있다. 2006년에 극장 문을 닫은 뒤로는 한동안 상업 용도로 사용돼왔다. 외벽에는 예전에 1관·2관으로 나눠 영화 포스터를 붙이던 자리의 흔적이 옅게 남아 있다. 극장은 사라졌지만, 이 일대는 2025년 지금도 시민들 사이에서 그대로 ‘육림고개’라고 불린다. 이름이 공간을 붙들고 있는 셈이다.
멀티플렉스와 도시재생
변화의 출발점은 2005년이었다. 2005년 10월 13일, 강원도 최초의 멀티플렉스였던 프리머스시네마 춘천점이 명동에 들어섰다. 6개 상영관, 698석 규모로 당시 지역에서는 보기 드문 시설이었다. 같은 시기 원주에도 대형상영관이 들어오면서 강원권의 영화 관람 방식이 ‘단관 극장’에서 ‘멀티플렉스’로 옮겨가기 시작했다.
육림극장은 이 변화 이후 관객을 빠르게 빼앗겼고, 결국 2006년 폐관했다. 건물은 남았지만, 극장의 역할은 그때 끝났다. 이 극장은 1996년 방영된 KBS 주말연속극 ‘첫사랑’의 촬영지로도 알려져 당시 춘천을 배경으로 한 장면을 기억하는 이들에게는 더 선명한 장소다.
2017년 춘천시는 ‘약사명동 일대 도시재생뉴딜사업’에 선정됐다. 사업 주제는 ‘공유·공생·공감 약사리 문화마을’이었고, 2017년부터 2021년까지 순차적으로 진행됐다. 이 사업을 계기로 육림극장 주변 골목은 외벽 정비, 보행 환경 개선, 청년층 유입을 위한 점포 조성 등이 이뤄지고, 예전의 낡은 시장 골목 분위기에서 조금씩 탈피하기 시작했다.
이 무렵부터 일부에서는 이 일대를 ‘육리단길’이라고 부르기도 했다. 공식 명칭은 아니지만, 극장 시절의 기억과 새로 들어선 가게들이 겹치면서 생긴 지역적 별칭이었다. 다만 도시재생이 이뤄졌다고 해서 극장 건물이 다시 문화시설로 바뀐 것은 아니었다.
주변에 젊은 상권과 공방‧카페가 늘어났지만, 그 건물 자체는 옛 극장 시절처럼 쓰이지 않았다. 결과적으로 ‘육림극장이 있던 곳’이라는 기억만 남고, 실제 극장 기능은 되돌아오지 않은 상태가 된 것이다.
극장은 사라졌지만 지명은 남아
현재 춘천에서 영화를 보는 공간은 2008년 개관한 퇴계동 스무숲 근처의 CGV 춘천점과 명동 일대의 롯데시네마 춘천점, 온의동 메가박스 춘천점, 애막골 메가박스 춘천석사점 등 네 곳이다.
육림극장과 피카디리극장 등 명동과 육림고개 일대에 있던 단관 극장들이 사라졌지만, 시민들은 여전히 “육림고개 쪽”이라거나 “옛 육림극장 근처”라는 식으로 말한다. 이는 조양동에 있던 피카디리극장이 폐관 후 다른 용도로 쓰이면서도 계속 “피카디리 있는 데”라고 불리는 것과 비슷한 현상이다. 실제 시설은 사라졌어도, 도시를 이해하는 머릿속 지도에는 그 극장들이 아직 좌표처럼 찍혀 있는 것이다.
육림극장은 단순히 영화를 상영하던 건물이 아니었다. 그곳은 약속을 잡던 장소였고, 휴가 나온 군인들이 들르던 곳이었고, 드라마 촬영이 이뤄졌던 지역의 상징이었다. 건물이 다른 용도로 바뀌었다고 해서 그 시간까지 사라진 것은 아니지만, 기록되지 않으면 금세 흐려지게 마련이다.
도시재생이 물리적 환경을 바꾸는 일이라면, 사라진 공간을 애도하는 일은 그곳에 있었던 관계와 경험을 기억하는 일이다. 춘천시가 약사명동 일대의 골목을 살려내겠다고 했지만, 그리 성공한 것 같지는 않다. 이제 남은 과제는 그 골목에 과거의 이야기를 얹어두는 일이다. “여기가 예전에 육림극장이었어”라는 말이 계속될 수 있도록 공간의 연원을 남겨두는 것이다.
도시는 계속 변한다. 건물은 기능을 바꾸고, 사람은 다른 길로 다닌다. 하지만 오래 사는 도시는 흔적을 남겨둔다. 육림고개를 지나며 “여기서 영화 봤었지”라고 말하는 순간, 폐관된 극장은 잠깐이나마 현재형이 된다. 사라진 공간에 대한 애도는 그 시간을 다시 불러내는 가장 단순하고도 확실한 방법이다.
김세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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